○연수원 법우님들 마음공부에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글을 소개합니다.
모 스님의 법문내용 입니다.
○ 중생마음 부처마음
탐진치 삼독심에 물들고 업식에 물들어 있는
우리네 중생의 마음을 닦고 닦아
부처님 마음 이루고자 수행을 해 나간다고 합니다.
부처님 되기 위해 정진해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엔
지금의 나는 중생이라는 어두운 마음이 자리합니다.
아직은 부처 되지 않은 중생이라는 생각이
자신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면서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의지를 합니다.
외부에 의지하고, 돈이며, 권력에 의지하고
종교에 의지하고, 신에게, 부처에게 의지를 하고 삽니다.
마음 닦는 수행자라고 해 놓고서도
그래도 아직은 부처가 아닌 중생이란 마음 때문에
확고부동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은 경계가 닥치면 능히 이겨내며 수행자임을,
이 밝은 부처님 법 만났음에 감사해 하며 행복해 하다가도
너무나도 큰 경계가 닥치고 나면 의례히 마음은 나약해 지기 쉽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닦지 않은 나약한 중생이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한참 잘못 나가고 있 는 것인지 모릅니다.
나는 중생이라는 생각,
그 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이제 한 가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고정된 관념 을 하나 바꾸고자 합니다.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하던 믿음을
\'일체 중생, 모든 존재(有)는 그대로 부처님(佛) 성품(性)이다\'라고 말입니 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생이기에 열심히 닦고 닦 아
부처님 되려고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아 왔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미 부처님 성품, 주인공 그 자체임을 밝게 알고 깨달아
부처님 성품으로써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불교는 성불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힘겹고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깨달은 큰스님들이 아니면 모두가 중생이기에 괴로움에 허덕인다고 말입니 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불교는 너무 어렵고 고된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부처가 되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다고 잘못 생각하여 온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성을 감추고 있을 때의 이 야기입니다.
우리는 불성, 주인공을 그동안 너무 감추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 다.
내면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성불이며 깨달음이라 여겨
그 일에만 매진해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우리의 깊은 곳에 꼭꼭 숨 어 있지 않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숨쉬며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항상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 뿐 아닌 이 온 우주 삼라만상과 늘 함께 호흡하고 있습니다.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다시말해 불교란
닦고 닦아 부처 되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부처임을 믿고 깨달아 부처님으로 사는 종교입니다.
생활불교, 생활수행이라는 것은
참선으로 깨쳐서 부처님 된 다음에 어떻게 하고자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생활 속에서
부처님으로 살아가는 수행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늘 부처님 마음으로 부처님 되어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의미의 생활수행, 생활불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언젠가 깨쳐서 부처 될 날을 기다리기만 해선 안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습 그대로 부처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던 생각지 않던간에
우리는 늘상 부처님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내면에서는 늘 부처님의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려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기적일 때, 화를 낼 때, 괴로울 때,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 칭찬받고 싶을 때...
이럴 때는 여지없는 중생마음으로 사는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늘 이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이타적인 모습도 있고,
나도 모르게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를 보면 따스하게 대해줍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를 보면 누구나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은 그대로 부처님 마음이 됩니다.
그 순간 한 생각 부처마음이 됩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면에서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저질러 실천하지 못하고
온갖 시비 분별을 일으키게 됩니다.
올라온 부처 마음을 우리네 중생 마음으로 뒤덮어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 다.
이를테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를 보고 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다가도
순간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텐데... 부끄럽다.\' 하는 생각에 걸리고,
\'혹시 나쁜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걸리고,
\'상습적으로 이러는 사람일지도 몰라\' 하는 마음,
\'이렇게 도와 준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겠지\' 하는 마음,
\'나도 힘든데 좀 더 벌면 그때 도와주지\' 하는 마음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니까\' 하는 마음 등
온갖 순식간 떠오르는 분별심들이 나의 부처님 마음을 뒤덮어 버리는 것입 니다.
누구나 순간 한생각 돌이키면 부처님입니 다.
한순간 한순간 우리는 부처님도 되었다가 중생도 되었다가 하는 것입니 다.
어찌 부처님이 멀리 있고,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여 중생마음으로 살지 않고
부처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문제가 바로 생활수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마음으로 늘상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까짓 이런 저런 삶의 괴로움 쯤은 넉넉하고 허허롭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부처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마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중생마음을 돌이켜 부처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인가요?
그것은 중생마음을 부처마음으로 공양 올리 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순간 순간 올라오는 중생마음을 내것이라 붙잡아 괴로워 하지 말 고
그 마음을 그대로 부처마음, 주인공 자리에 온전히 맡겨버리는 것입니 다.
중생마음으로 잡고 살 것이 아니라 부처마음으로 놓으며 살아가는 것입니 다.
\'나다\' 하고 붙잡으면 영락없는 중생마음이 됩니다.
괴로운 것도 내가 아닌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고,
행복한 것도 내가 아닌 부처님이 행복한 것이라고
턱 하고 부처님께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본래로 그 부처님 본래자리에서 나왔으니
다시금 돌이켜 그 나온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수행자는 얼마나 행복한 지 모릅니다.
즐거움에 너무 들뜰 것도, 괴로움에 너무 쳐져 있을 것도 없습니다.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오직 부처님!\' 할 뿐입니다.
괴로운 상황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욱하 는 마음이든
일체 모든 것들을 부처님 본래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중생마음은 부처마음으로 살아지게 됩니다.
이 밝은 생활수행은
탐진치 삼독에 물든 거짓 \'나\'를 버리고
부처님 본래자리 주인공을 드러나게 하는 수행방법입니다.
결코 이것은 기복이 아닌 것입니다.
나를 죽여야 나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아상을 녹여야 밝게 깨친 참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부처님을 친견하는 수행법입니 다.
순간 순간 내 마음이 부처님 마음 되는 수행법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밝게 깨친 부처님 삶을 살아가는 것 입니다.
이 얼마나 쉽고 똑 부러지는 밝은 수행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