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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강좌
2012.12.18 17:10

업설(業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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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설(業說)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六師外道)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을 비판하고, 이들의 가르침이 가져올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허공도 아니요 바다도 아니다.

깊은 산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도,

일찍이 내가 지은 악업의 재앙은

이 세상 어디서도 피할 곳 없나니 <법구경>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고통스러운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인과응보라고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 한다. 은 산스크리트의 까르마(karma)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기 운명를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출신계급이나 삶의 조건조차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따른 과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그 죄값을 받지 않는다고 언짢아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움 과보를 낳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혹--고의 삼도'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는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 한다. 업이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 가지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삼업의 과보는 매우 정확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그 삶은 구속받고 고통스러워진다.


반면 선업을 쌓을수록 삶은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벗어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 karma)


이란 조작(造作), 인위적 행위,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 즉 짓는다는 뜻이다. 모든 유정(有情)들의 경험 등 일체 행위는 훈습(薰習)된 습기(習氣)라는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이를 업력 또는 업장(業障)이라고 함), 이것이 원인이 되어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업설은 선인선과(善因善果), 안인악과(惡因惡果)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달리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업보(業報)라고도 한다.


업은 성질면에서 나누면 선한 것과 악한 것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세가지로 구분된다. 또한 업의 종류로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이 있는데 근본이 되는 것은 의업(意業0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와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업(意業)을 사업(思業),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을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한다.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매우 합리적인 사회윤리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실제적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문제성을 던져 줄 때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과율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극악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잘 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일만 하는데도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십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문제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전생.현생.내생의 삼세업보설로 설명한다. 즉 위의 사례는 현재 업인이 있는데,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과 과보는 있으나 그 업인이 현재 발견되지 않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당장에는 업설이 틀리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지혜의 눈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마치 형체의 그림자가 따르듯이 이러한 인과의 법칙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업설은 현세의 괴로움을 과거의 업보로 돌리고 체념하는 소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지니려는 목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업에는 개별업(個別業)과 공업(共業)이 있는데 업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되는 것이 개인이 짓고 개인이 그 과보를 받는 개별업(個別業)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사회적인 존재이며, 더우기 환경문제는 심각한 현대사회에서는 공동으로 짓고 그 과보를 공동으로 받는 공업(共業)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대개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로 활동을 한다. 뜻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활 동하거나 말로 표현합니다. 대개는 뜻이 먼저 있고 그에 따른 말이나 행동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업을 일으키는 본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의지라고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등, 자세히 말하면 내 몸이나 나의 주위환경이나 나의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온갖 생활여건들은 그 일차적 원인이 자신의 업에 있다 할 것이다 . 


착한 업을 지으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고 악한 업을 지으면 악한 결과를 불러온다. 우리들 자신과 환경을 만든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다. 우리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행위의 끝남과 함께 없어지는 듯 보여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종자로서 성장하여 반드시 그 결과를 부르게 된다.

우리들이 받는 업을 분류하면 인생에 과보를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업을 인업(引業) 또는 총보업(總報業)이라고 하고 인간계에 태어난 자에게 개개의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을 만업(滿業) 또는 별보업(別報業)이라 합니다.

또 산하대지와 같이 서로가 공통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하고 개별 생명 고유의 과보를 부를 업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합니다. 이 모든 업은 필경 그 행위의 동기가 중요하며 동기에 따라 선악의 업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착한 업을 지으면, 인간이나 천상에 나기 때문에 그 생활환경이 비교적 자유스럽고 고 통이 적지만, 악한 업을 지었을 때는 고통스럽고 장애가 많으며, 그로 인하여 향상할 좋은 업을 짓기도 어렵게 된다.


악업 때문에 일어나는 장애를 업장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은 악업을 짓지 말아야 하며 끊임없이 참회하고 적어도 선업을 짓도록 하여야 한다.

업은 물체의 그림자처럼 업주를 따라 다닙니다. 악도에 떨어져 내지 지옥에 가는 것도 필경 자신이 지은 악업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한다. 


업은 지음이 있는 행위이고 그 행위는 마음의 행위 즉 생각하는 행위인 것이다. 선업은 선과를 가져오고 악업은 악과를 가져온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이든 악이든 업을 짓지 아니하여 생사윤회를 벗는 것이 요긴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본성을 보고 본성에 돌아가 지음이 없는 청정행을 하는데 있다 하겠다. 


그리고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업을 지은 현생에 받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순현업(順 現業)'이라 하고, 그 생애는 안 받고 다음 생에 받는 업을 '순생업(順生業)'이라 하며, 다음 생에도 받지 아니하고 세번째 이후에 받게 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받을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하고 과보 받을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금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받지 않는다고 하여 인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리고 한번 지은 업은 과보를 받게 될 때까지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므로 우리들 은 항상 마음을 닦고 밝은 자성을 깨닫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성을 깨달으면 비록 지은 업이 나타나더라도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 업(業)의 종류


- 삼업(三業): 선업, 악업, 선악업이 아닌 무기업(無記業)의 삼업과 신(身) 구(口) 의(意) 삼업.

* 의업(意業): 사업(思業), 구업(口業)과 신업(身業): 사이업(思已業; 생각에 따라 일어남)

- 개별업(個別業)과 공업(共業): 개인과 공공이 짓는 업.
- 인업(引業) 또는 총보업(總報業): 인생에 과보를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업.

- 만업(滿業) 또는 별보업(別報業): 인간계에 태어난 자에게 개개의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

- 삼시업(三時業): 업이 결과를 가져오는 세가지를 시기별로 분류

(1) 순현업(順現業):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현생에서 받는 업

(2) 순생업(順生業):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다음생에서 받는 업

(3) 순후업(順後業): 현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를 차차후생에서 받는 업.


- 십업(十業): (1) 살생(殺生) (2) 투도(偸盜) (3) 사음(邪淫) (4) 망어(妄語) (5)양설(兩舌) (6) 악구(惡口) (7) 기어(綺語) (8) 탐(貪) (9) 진(瞋) (10) 치(痴)


불교의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방편설(敎化方便說)'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업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업설뿐만 아니라 무아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가 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교의 무아설은 앞서 십이연기설의 중도설(中道說)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명 망념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그것까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본다는데(십이처설), 이런 입장과 삼세업보설은 모순되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숙세나 내세와 같은 것은 보통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교 교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께선 각 종교의 진리성 주장에 대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현실 세계의 관찰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로 시종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삼세업보설은 권위주의적 입장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인과를 관찰하면 누구나 그 필연성을 추단(推斷)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업설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소산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업보의 실상(實相)이 직접 인식되는 숙명통(宿命通)이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지혜도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삼세업보설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임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부터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계율은 업설에 입각한 것이며, 과거 칠불(七佛) 또한 모두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 七佛通戒偈)을 읊고 계신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하며 그 의지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석가모니께선 당시 인도사회의 사성제도(四姓制度)를 비판하고 배격하신 것도 업설의 정신에 의했던 것이다. 사성은 모두 선,악업에 의해 상벌이 결정되는 것이니,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성(種姓)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20> 


바라문교의 공희(供犧, 邪盛大會)에 대해서도 수백 마리의 소와 양 등을 살상하는 것은 반대하셨으니, 이것 역시 업설의 불살생에 의한 것이다.<잡아함 권 4> 


불교 업설의 사회 윤리적 성격은 오늘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 등이 민주시민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는데, 업설에서의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報)는 그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 또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관은 현실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이라고 보겠는데, 업설의 정신은 바로 그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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