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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
2012.12.23 17:40

남방불교사 및 북방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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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사 및 북방불교사

1. 남방불교사

12세기경 이슬람 정복자의 인도 점령 이래로 점차 쇠퇴를 거듭한 불교는 16세기에 이르면 인도대륙에서 사라졌다고 할 만큼 그 세력이 미미해지고 만다. 더구나 잔존해 있던 교단도 힌두교와 습합되어 본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인도 밖으로 전파된 불교는 각 나라의 종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인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국, 일본에 이르는 북방불교와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등의 남방불교로 이분할 수 있다.

남방불교는 테라바다(Therava-da), 즉 상좌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흔히 상좌불교 또는 상좌부불교라고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불교를 가리키며, 초기 불교승단의 전통이 상당 부분 이어져 오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비구니 교단은 11세기경에 그 맥이 끊긴 채로 단절되었다. 1998년도 통계에 따르자면, 전 세계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는 6%이고, 그 중에서 상좌부불교를 따르는 불교도가 38%를 차지하고 있다.

1. 스리랑카
인도 아쇼카 왕의 전법사가 불교를 스리랑카에 이식시킨 이래로 변함없이 불교는 스리랑카의 중심 종교였다.

일찍이 아쇼카 왕은 아들 마힌다(Mahinda) 비구를 스리랑카에 보내서 불법을 전수하였으며, 딸이었던 상가미타(San?hamitta-) 비구니를 통해서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던 바로 그 자리의 보리수 한 가지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 보리수는 지금도 아누라다푸라에서 생명을 잇고 있는데 거국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전 세계 불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신성한 순례지이기도 하다.

마힌다 장로는 데바난피야 티사 왕(기원전 250~210년 재위)의 외호를 받아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 대사(大寺)를 세웠는데, 이는 후일 정통적인 대사파의 근거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 무외산사(無畏山寺)가 세워져 또 다른 일파를 이루었는데, 이로써 교단은 대사파와 무외산사파로 양분되었다. 두 파는 각각 보수와 진보교단으로 대립하였고, 무외산사파가 대승불교와 밀교를 수용함으로써 그 대립은 극심해졌다. 이러한 대립 양상은 오래도록 지속되다가 12세기에서야 대사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어 교단이 정비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리랑카불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팔리경전의 전승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사파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에 이미 불전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경렝껭논 3장뿐 아니라 장외불전까지도 편찬하여 경전연구의 깊이를 더하였다.

11세기 초 스리랑카를 점령한 힌두교 세력의 탄압으로 인하여 한때 불교교단은 위축되었고,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의 외세로 인해서 불교세력이 한껏 약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회복한 후 불교교단은 더욱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스리랑카는 명실공히 남방불교의 핵심 성지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전 세계 불교도의 순례지로서도 각광받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전 인구의 67% 정도가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싱할라족이다.

2. 미얀마
인도의 동쪽 국경을 잇대고 자리한 미얀마는 스리랑카 못지않은 오랜 불교역사를 가지고 있다. 흔히 ‘미얀마에 태어나는 것은 곧 불교도가 되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미얀마의 불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뿌리 깊은 종교라 할 것이다.

미얀마의 불교는 정치세력의 부침과 운명을 같이하였는데, 3~9세기에는 부파와 대승불교가 혼재되어 있다가, 그 후 밀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토착종교가 공존하는 시기를 거쳤다.

11세기 중엽에, 미얀마의 북부 파간을 중심으로 세워진 통일국가의 왕 아노라타(Anawrahta)가 스리랑카의 대사파 계통의 상좌부불교를 수용했는데, 그 후로 상좌부의 맥이 끊기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파간시대 이래로 정치적 지배세력과 불교승단의 우호적 관계는 계속 유지되어 왔으나, 19세기 말 영국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정이 무너졌고 그 후 정치적인 혼란을 거듭하면서 불교승단도 그 영향력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미얀마 정부가 불교의 이상실현을 표방하면서 적극 후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3. 타이
현재, 타이(태국)의 불교를 한마디로 특징짓는다면 ‘국민 모두가 승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가 생활 속 깊이 스며 있다는 점일 것이다.

타이에서는 신체 건강한 자로서 20세가 넘으면 누구나 승려가 되도록 추천을 받을 정도로 온 국민의 불심이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교단 통치법’이라는 실정법을 통해서 불교교단의 활동을 규제하고 있다.

타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승불교시대일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구체적인 사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13세기 중엽에 타이 민족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스코타이 왕조대에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스리랑카의 상좌부불교를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14세기부터 타이를 지배했던 아유타야 왕조가 불교의 중흥을 위해 전력하였고, 1783년에 세워진 방콕 왕조의 후원으로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특히 라마 4세(1851~1868년 재위)는 사회적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불교교단을 더욱 엄정하게 개혁하고 계율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때 왕의 정책을 따랐던 정법파(正法派)와 그렇지 않았던 대중파(大衆派)로 교단이 이분되었다.

정법파는 왕실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계율을 엄격히 준수하지만, 대중파는 계율이 그리 엄격하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 두 파 사이의 교의상 차이는 거의 없다.

현재, 타이의 사원들 중에서 90% 이상이 대중파에 속한다.

4. 캄보디아
타이의 상좌부불교가 전해진 캄보디아의 불교 또한 타이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남방의 다른 나라보다는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세력이 좀더 오래 번성했다는 점이 다르다.

크메르 왕조는 자야바르만 2세(802~869년 재위) 이후부터 9~10세기경의 최성기에 이르기까지 수도 앙코르에 수많은 사원들을 건립했는데, 그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예술성은 오늘날에도 경이로운 세계 유산 중 하나로서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13세기경 서북쪽에서 타이인의 세력이 발흥하여 영토를 침입하기 시작하자, 크메르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유입되기 시작한 상좌부불교는 현재까지 캄보디아의 중심사상으로서 국민을 이끌어 왔다.

다만 캄보디아에 대한 타이의 정치적 영향과 압박이 끊이지 않은 만큼, 타이불교교단의 영향력 또한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 캄보디아불교의 한 성격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1930년에는 타이불교교단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뜻으로 프놈펜에 불교연구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현재, 전 국민의 85% 정도가 불교도로서 신앙생활에 충실하고 있다.

5. 베트남
베트남의 불교는 북부 홍하(紅河) 유역에 있던 교지(交趾)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교지는 중국으로 항해하는 선박들이 마지막으로 기착하는 곳으로서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 가장 빨랐던 지역이기도 하다. 교지를 통해서 베트남 전역에 퍼진 불교는 10세기 중엽에 중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를 실현한 후, 불교 또한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다.

단명했던 딘(Dinh) 왕조(968~980년)시대 때 불교에 대한 왕실의 후원이 시작되었는데, 그 대를 이었던 리(Ly) 왕조(1009~1224년) 치하에서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리 왕조는 북방의 강력한 나라들의 견제와 투쟁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진보를 이루었다. 리 왕조가 세웠던 다이 비에트(Dai Viet)국은 전반적으로 당나라를 모방하여 운영하였으며, 생활영역에서도 중국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왕실은 불교교단을 아낌없이 지원하였고, 사원의 건립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그 당시 불교는 대중 속에 널리 퍼져 있었고, 지역적인 관습과 혼합되어 있었다. 특히 마을의 수호신과 정령(精靈)에 대한 신앙 및 숭배의식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리 왕조는 당나라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승려들이 왕국의 행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고, 중요한 정치적 역할도 맡겼다. 그 결과 12세기 중엽에 불교는 정식 국교의 지위에 올랐다.

그 후로 베트남의 불교는 선(禪)과 정토(淨土)의 교의를 중심으로 하여 대승불교의 맥을 이어왔는데, 중국불교의 양상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1848년 메콩 델타의 안강성(安江省)에서 발족한 정토계의 보산기향파(寶山奇香派)는 ‘나무 아미타불’만 염불하면 족하고 절이나 승려도 중요치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반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신흥교단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보산기향파는 이후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중요한 정치집단으로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베트남의 역사는 격동기를 맞이하는데, 그와 함께 불교 또한 민족주의의 선봉에서 정치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베트남의 불교사는 투철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 참여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그 특징으로 꼽히지만, 일부에서는 도교와 습합된 불교의 양상이 상당 부분 미신적 신앙의 경향을 띠기도 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년에는 틱낫한(Thich Nhat Hanh, 1926~ ) 스님 등의 활약으로 베트남불교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6. 라오스
라오스는 본래 ‘란상(Lan xang)’이라 하였는데, 이는 ‘백만 마리 코끼리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수백 마리의 코끼리들이 무리를 지어서 메콩 강에서 목욕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메콩 강 상류 지역인 루안프라반을 중심으로 란상 왕국이 세워졌던 14세기 중엽에야 불교가 전파되었다. 란상의 파궁 왕(1354~1373년 재위)은 캄보디아에서 고승을 초청하여 불교를 수용하였고,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파궁 왕 이후 정책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여 곳곳에 사원을 세웠는데, 왓트 프라케오, 타트 루안 등 그 당시 세워진 사찰들은 지금도 라오스의 중심 사찰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라오스의 지형은 산악지대와 평야지대로 이분되는데, 불교도는 주로 평야에 사는 라오인들이 신앙하고 있다. 현재 전체 인구의 60% 정도가 불교도인데, 라오인들은 주로 상좌부불교를 따르며, 소수의 중국인과 베트남인은 대승불교를 믿는다.

1960년 혁명 당시에 불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라오스 사회주의 정권은 최근 들어서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쓰고 있으며, 제한적이나마 외국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여 라오스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 북방불교사


1. 티베트
소승, 대승, 밀교가 잘 어우러져 있는 티베트불교의 역사는 손첸감포(581~694년) 왕 때로부터 시작한다. 손첸감포 왕이 재위하던 당시 인도와 중국, 두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유입된 불교는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종교가 되었다.

특히 티송데첸 왕이 재위하던 794년에는 삼예사에서 중국계 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과 인도계를 대표하는 카마라쉴라(740~797년)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불교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사건으로 남아 전한다. 그 때 마하연과의 대론에 승리한 카말라쉴라는 인도 중관사상을 티베트에 전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하연이 보낸 네 명의 중국인들에 의해서 위장이 도려내지는 참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치열한 대론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한 티베트의 불교사는 짧은 폐불기와 침체기를 제외하고는 정치,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지도이념으로서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해 왔다.

13세기 후반에는 티베트대장경을 완성하여 자국어로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불교의 보급이 더욱 활발해졌다.

또한 티베트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달라이라마라는 법주(法主)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인데, 달라이라마의 계승 자체가 불교적 전생(轉生)사상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티베트불교를 흔히 ‘라마교’라고도 한다.

그런데 외세의 끊임없는 침탈에도 굳건히 나라와 신앙을 지켜왔던 티베트는 1950년 가을, 중국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서장 자치구로 강제 편입시킨 뒤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다. 나라 잃은 티베트 유민들은 중국의 탄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흩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접경해 있는 인도에 정착했다.

현재, 티베트불교는 티베트 국경 밖에서 활발히 전파되고 있으며, 그들의 불교문화에 대한 이방인들의 관심은 더욱더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특히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인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큰 몫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네팔
네팔은 고타마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룸비니 동산이 자리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총 인구 2,500만 명 중에서 약 5% 정도만이 불교도일 뿐, 거의 대부분은 힌두교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원에는 힌두 신상과 나란히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네팔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습합되었던 인도불교의 말기 현상에서 좀더 힌두화 경향이 심화된 형태가 잔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5세기부터 9세기까지 네팔을 지배했던 릿차비 왕조 때, 힌두교와 함께 불교도 유입되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6세기 중엽의 라마데바 왕 시절에는 관세음보살신앙이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점차로 여러 신격과 보살신앙이 등장하였고, 이어서 밀교가 자리잡았다. 그러나 힌두교의 세력이 한층 커지게 되고 마침내 힌두교 속으로 불교는 완전히 흡수되다시피 하여 두 종파의 신도를 가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통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네팔의 불교를 힌두교와 분리하여 명료하게 이분하고자 시도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할 것이다. 그만큼 네팔불교의 의례나 사상은 힌두교의 영향 아래 놓여 있고, 신도들의 신앙 면에서도 양자 구분은 무의미할 만큼 합체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팔의 불교를 가리켜 ‘힌두교 옷을 입은 불교’라고 말하며, 인도불교의 최후의 양상이 네팔 땅에서 보다 더 진전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3. 몽고
비단길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유입된 불교는 몽고에서도 선진사상으로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티베트 왕의 스승으로서 추앙받던 팍파(1239~1280년)는 몽고에 티베트불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는 기록도 남아 전한다.

16세경에는 불교가 몽고 전역으로 보급되어 전 국민의 신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는데, 특히 몽고의 지배계층을 비롯한 지식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수많은 이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 칭기스칸의 후예인 자나바자르(1635~1723년)는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예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특히 조각상을 주조하는 데 뛰어났던 자나바자르의 작품에는 몽고인의 심미적인 이상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온 불교 도상학에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몽고의 승원은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쇠퇴의 길을 걸었으나, 민중들의 신앙은 맥이 끊기지 않아서 지금은 다시 부흥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4. 일본
일본의 불교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이다.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는 538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용명(用明) 천황의 제1 황태자였던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년, 573년부터 섭정)가 불교의 수용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성덕태자는 중앙집권을 이룬 뒤 불교사상을 기조로 하여 통치함으로써 일본불교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그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데 전력하였고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중국불교가 최성기에 달해 있던 나라(奈良)시대 때는 여러 종파가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정립되었다. 6종은 삼론종, 성실종, 법상종, 구사종, 율종, 화엄종 등이었으며, 일본의 사상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불교 종파의 특징은, 개인이 각 종파를 두루 섭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한 사찰에서 여러 종파를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에서의 각 종파는 학문적 구분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파벌적 대립성은 약한 탓으로 보여진다.

일본에서의 불교는 국가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서 전개되다가,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이르러서야 소위 민중불교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지 6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민중의 종교로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재 가장 많은 신자 수를 보유한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교단이 승려의 독신계율을 포기하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정토진종을 비롯한 일본의 대다수 종파에서는 출가 승려라 해도 독신 생활을 하기보다는 결혼을 하고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사찰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있으며, 승려 신분으로도 다른 직업을 택하여 종사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일본의 승려를 가리켜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적절히 변용시켰던 것과 같이, 일본에서도 토착신앙인 신도(神道)와 결합하여 붓다를 신도적 신의 일종으로서 섬긴다든지, 일본 특유의 세속화된 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여 변용, 발전시켰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나 욕구나 관습을 부정하지도 억누르지도 않으면서, 어떤 초월적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속생활의 구조 내부에서 만족스럽고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 일본불교사에 등장하는 고승들 대부분이 세속생활을 중시하여 계율의 준수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시켰다.

그 결과, 일본불교는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다도(茶道), 원예, 서예, 그리고 ‘노오(能)’라고 불리는 가면 음악극 등에 불교정신을 수용하여 우아하게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 대만
공식적으로 대만(臺灣)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661년 명나라 영력(永曆) 10년 봄이었다. 그 때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침공한 이래로 명나라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불교도 함께 전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민간신앙의 차원에서는 이미 보급되었으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에 이미 중국 전역에 유포되어 있었고, 대륙과 대만 간의 왕래는 매우 빈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전래 이전에 이미 대만 전역에 걸쳐 많은 불교신도가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1683년 8월에는 청(淸) 왕조가 대만을 점령하였으며, 곳곳에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특히 관음신앙이 성행했는데, 대부분의 사원관련 건물이름으로 ‘관음’을 내걸 정도였다. 예컨대 관음사(觀音寺), 관음궁(觀音宮), 관음묘(觀音廟), 관음정(觀音亭) 등이었다. 이러한 관음신앙의 성행은 사회적 상황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고난에서 구제해 주는 관음의 이상은 불안한 민중의 심리를 위로해 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명ㆍ청의 사회적 변혁기에 대만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1895년부터 거의 50년 동안 대만이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일본불교도 유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 이후에 대만 곳곳에는 ‘불교학원’이 창립되어 각 지방의 신앙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15곳에 달하던 불교학원 중에서 지금도 4곳의 불학원(佛學院)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불학원은 불교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곳으로서 한국식 강원과 대학의 절충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만의 사찰들은 대부분 독립법인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유치원부터 중ㆍ고등학교 및 병원까지 갖추고 있다.

대만불교의 교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년 동안에,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중화 대장경(中華大藏經)의 편찬을 비롯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여성 출가자의 수도 급증하여 수행과 포교면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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