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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과 수행
2012.12.22 16:00

염불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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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

염불수행.jpg

 

1. 염불수행의 의미

1) 염불의

염불에서 말하는 념이란 지킴(守)을 뜻합니다. 참 성품을 늘 드러나게 하고 끝없이 기르려면 그것을 지키어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불에서 말하는 불이란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이란 참 마음을 밝게 비춰서, 늘 깨어 있어 어둡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무념으로 밝고 뚜렷하게 깨닫고 이렇듯 밝고 뚜렷하게 깨달으면 온갖 생각이 끊어지니 이것을 일러 참 염불이라 합니다.(보조스님의 <염불요문>중에서)

염불이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부르거나 상호를 관상하거나 공덕을 의념함으로써 부처를 보고 부처를 이루며 불국토에 왕생하는 수행법이다. 염불은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으로 가장 더욱 대중적으로 행해지는 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정토불교에서는 염불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수행체계와 방법를 세워 발전시켰으므로 요즘은 염불하면 극락왕생을 떼 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정토신앙은 한마디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교주(주불)이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보처 보살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주로 하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조적인 염불로 한다. 이러한 정토신앙에 근거한 염불외에도 독자적인 관음신앙과 지장신앙에 기반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염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염불이 불보살의 본원력에 의지하므로 타력신앙이라고 생각되지만 자력이 없는 타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자력과 타력이 동시에 갖추어지는 수행이다. 더구나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정토에 나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정토에 날 수 없으며 보리심을 발하고 일심으로 염불행을 닦아야 한다. 정토가 서쪽으로 십만팔천만리 밖에 있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부처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실제로는 십선과 팔정도를 닦으면 그 거리는 바로 사라지고 곧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방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부처님도 바로 우리 마음의 바탕으로서 우리 마음이 청정해지면 무량한 광명이 이 마음으로부터 밝게 빛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믿음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양한 염불법 중에서 칭명염불이 주가 되었는데, 염불의 염이 억념, 작의 등의 의식작용을 의미하듯이 생각이 소리와 결합되어 일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염불이란 입으론 부처를 부르며 마음으론 본성을 찾는 일,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찾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무슨 이익 있으랴.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 법문은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되 분명하고 어지럽지 않도록 해야 하는바, 이처럼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게 염불이다.<선가귀감>

 

2) 염불수행의 역사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함경에 보면 삼념, 오념, 육념, 10념 등의 염법이 있다. 즉, 염불, 염법, 염승, 염계, 염시,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부처님의 계율과 가장 깨끗하며 선한 공덕이 있는 하늘을 생각하는 오념법, 여기에 보시를 생각하는 것이 더해진 육수념이 있다. 그리고 육수념에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념휴식, 출입하는 숨을 세고 장단 등을 아는 념안반, 이 몸은 항상하지 않음을 생각하는 념신, 이 몸은 결국 죽는다는 염사 등을 더하여 십념이 되었다.
염불이 지금처럼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 지리잡게 된 것은 역시 정토신앙과 관련이 깊다. 정토신앙은 부처님의 본원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신앙으로, 정토왕생의 방법으로 염불이 권장되기 때문이다. 정토신앙은 기원 후 1~2세기에 걸쳐 대승불교 운동과 함께 출가교단은 물론 재가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정토신앙은 인도에서 서역·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마명보살의 기신론,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론과 지도론 또한 세친보살의 정토론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서원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바, 이왕이수의 행법임을 찬양하였다. 중국에서는 혜원, 담란, 지의, 도작, 선도, 자민, 지례, 주굉 등으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논의와 주장들이 있었으며 다른 종파와 결합하여 쌍수하는 모습으로 정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뿌리내렸다. 원효, 자장, 의상스님 등 신라 대표적인 스님들은 물론이고 많은 학승들에 의해 정토삼부경에 대한 번역과 각종 주석서가 집필되어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대각, 보조, 태고, 나옹스님들에 의해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독자적인 종파로는 성립하지 못하였고, 조선시대에 함허, 서산, 사명대사 등이 선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여 지금도 염불은 승속을 막론하고 가장 대중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 예로보면 발징화상(發徵和尙)의 만일염불회가 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만일 염불정진을 시작, 29년 만인 병인년(786)에 만일이 되었다. 그 날 금빛찬란한 아미타불이 현신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염불만일회가 처음 개설된 도량이 바로 금강산 건봉사이며 발징화상에 의하여 창도되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하여 한국의 대소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현풍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근래들어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다.
일본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법연이 정토종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인 친란은 정토진종을 개창하였다. 또한 일편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추며 염불하는 법을 가르쳐 종교적인 절정을 맛보게 했으며, 신기(神祇)신앙과 아미타신앙을 융합하여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밖에 없다고 설하는 시종을 열었다. 이들 정토교의 교파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일본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대표적인 정토교는 정토진종과 서산정토종, 시종이 있다.

3) 염불 수행의 의의

염이란 마음 속으로 하는 것으로,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염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로써 비유하면, 선비가 생각 생각에 공자를 생각하고 기억하면 공자에 거의 가깝게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생각 생각에 오욕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부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을 그르다 하는구나! <죽창수필>

참선하는 사람들이 염불을 경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는 말이다.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잠시라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바로 염불이니, 생각이 곧 부처의 생각이요, 말이 곧 부처의 말이며, 행동이 곧 부처의 행동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염불하는 자의 모습이 당연히 부처를 닮아갈 것이므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의 문이 여럿이나 궁극적 경지는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문으로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택법하여 여일하게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고 또 쉽게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옛부터 재가불자에게, 하근기 중생에게, 말세중생에게 특히 권해졌다. 왜 그런가. 불교 수행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성불이란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는 말이고,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성을 보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망념을 쉬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중생심을 한 번 돌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염불에서는 거두절미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라’고 한다. 거창한 이론도 복잡한 절차도 필요치 않다. 아무생각없이 염불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생심이 조금씩 사그러든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엔가 염불삼매가 되면 망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자성불이 드러난다. 또한 비록 염불삼매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공덕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수행보다 쉽게 할 수 있으면서 공덕이 크고 부작용이 없으니 말세중생에게 권하는 것이.

 

 

4) 염불수행의 원리

염불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믿고 자기 마음 가운데서 부처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염불만의 일이 아니고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표이다. 그런데 염불이 탁월한 점은 이행도라는 것이다. 이행도의 뜻은 앞서도 말했듯이 실행하기 쉽고 증득하기 쉽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염불을 통해 소원이 성취되고 장애가 사라지며 무생법인을 얻고, 극락왕생하며 성불하는 원리가 무엇인가. 이것은 모두 불보살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자비심과 우리가 불보살님을 그리는 마음이 만나서 얻어지는 것이다.

대세지 법왕자가 그 동안 五十二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여쭈었다.
“나는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항하사겁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이름은 무량광이시며, 열 두 부처님이 한겁 동안에 계속하여 나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超日月光이시라. 그 부처님이 나에게 염불삼매를 가르치시기를 ‘마치 한 사람은 專心으로 생각하거니와, 한 사람은 전심으로 잊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간절하면 이 생에서 저 생에 또 저 생에 이르도록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아니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 생각 하시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 하거니와 만일 자식이 도망하여 가면 생각한들 무엇하랴. 자식이 어미 생각하기를 어미가 자식 생각하듯이 하면 어미와 자식이 세세생생에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리라. 만일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이 생에서나 혹은 저 생에서 결정코 부처님을 뵈올 것이며 부처님과 서로 멀지 아니하여 방편을 쓰지 않고도 저절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향기를 쏘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배는 것 같으리니 이것이 향광장엄이니라’ 하시더이다.
나는 본래 인행 때에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었고 지금도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인도하여 서방정토로 가게 하나이다. 부처님이 원통을 물으시니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 저것을 가리지 말고 육근을 모두 가져다가 항상 염불하되 깨끗한 생각이 서로 계속되어 삼마제를 얻는 것이 제일이 되겠나이다.”<능엄경>

아이가 어머니를 잃어 버렸을 때 아이가 스스로 찾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부름으로써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머니는 자식을 잃어버리면 자식이 찾는 것 보다 더 절실하게 아들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어버이이신 불보살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고 계시니 우리가 마음을 다해 그분을 만나고자 하면 곧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다만 찾고나면 우리의 근본성품이 곧 아미타부처님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한치의 간격도 없이 중생심이 머물던 바로 그 자리가 법신·보신·화신의 체성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삼세제불이 모두 이 마음부처를 증득한 것이니라. 육도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을 왜 모르는가? 다만 미혹해서 염불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알아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부처를 여읜 것 아니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부처를 잊지 않나니 옷 입고 밥 먹는 것도 부처요, 어느 곳을 가나 오나 모두 다 부처일세. 가로도 세로도 모두 부처요, 생각생각이 또한 부처이며 마음마음이 다 부처일세. 손을 놓고 활발히 집으로 돌아가서 부처를 보라!
근본성품의 둥근 광명이 본래 공(空)한 체성의 부처님(空佛)이요, 한 번 굴려 한 생각을 요달하면 그 이름이 곧 부처로다. 항상 머물러 멸하지 않는 까닭에 무량수불이라 하나니 법신 · 보신 · 화신의 체성은 조금도 부처님과 다를 바 없다네.
다만 욕심과 분노와 질투로 스스로 자기 부처를 상하게 하고, 주색잡기로 천진불(天眞佛)을 그르치며, 너다 나다 시비하여 육근으로 부처를 물리치도다.
아! 한 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구할건가?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부처님 법을 듣지 못하리니 정녕코 서로 권할지니, 따로이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 말고 은밀히 빛을 돌이켜서 자기 부처에게 귀의할지어다.
(발징화상의 <권념문> 중에서)

 


2. 정토신앙과 염불수행

앞에서는 염불수행의 원론적인 면을 다루었으나 앞으로는 실제수행의 방법론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어 염불수행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미타정토신앙과 연관된 몇가지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

 

 

1) 신(信)

총설에서도 수행에 있어 가장 근본은 발보리심과 신심이라고 했다. 정토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토불교에서는 수행의 기본요건으로 신·원·행의 3자량을 말한다. 첫째 신이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실존을 믿는 것이고, 둘째 그곳에 가겠다는 원을 세우는 것이며, 셋째 실천행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수행과 마찬가지로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앞에서 말한대로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믿는 것이고, 염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불설아미타경>에서 석존도 ‘염불법문은 세간에 믿기 어려운 법문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법의 골간은 완전히 신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신심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다. 신심이 있으면 행동에 옮길 수 있어서 인(因 = 信) · 과(果 = 行)가 원만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문이 비록 넓다 하더라도 불신하는 중생은 능히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 · 원 · 행을 정토의 삼자량이라 한다. 자량이란, 비유컨대 먼 길을 여행하자면 자재와 양식이 필요하여, 만약 이 두 가지가 빠지면 절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 삼자량이 다시 서로 연관관계가 있어서 차례대로 신으로 말미암아 원이 나게 되고 원으로 말미암아 행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신이 만약 구족하지 못하면 원과 행도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의심은 도에 장애가 되어 원과 행이 생기(生起)할 수 없게 한다. 만약 신심이 있으면 자연히 그 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게 되며,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면 자연히 법을 의지하여 행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만약 차토의 선입견에 빠져있는 채 여래의 신변(神變)과 중생의 정식(淨識)으로 종합하여 만들어진 극락세계를 비교하려 한다면, 마치 개미가 인간의 국가와 사회의 갖가지 복잡한 조직과 행동을 추측하려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설사 만년을 추측하더라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노릇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부처가 아닌 이상 어떻게 명백히 부처의 지혜와 신통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왕 분명히 알 수 없다면 함부로 추측하는 따위의 우를 범하지 말하야 할 것이요, 다만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여 착오나 공(空)에 떨어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매우 총명하다. 절대 그러한 속임수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한다면, 지혜있는 자가 보기에는 이야말로 어리석고 서투른 짓이며, 복혜(福慧)가 천박한 자의 소행임을 간파할 것이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얻기 어려우면서 가장 손쉬운 법문을 능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정법개술)

이와같이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신·원·행의 3자량이 필요하며, 그 중에서 신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산에 오른다고 하자. 먼저 산이 거기에 있으며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산에 오르겠다는 마음을 내야 하며, 세 번째 실제로 산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원을 세울 때 산의 중턱까지만 가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상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정상까지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중턱에서 내려다 본 경치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믿음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정상까지 가겠다는 발심이 중요하며, 마직막으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오르는 행이 필요하다.

 

 

2) 원()

이와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이 원이다. 무슨 일이나 목표가 분명해야 목적지에 재대로 도착할 수 있다. 모든 불보살님도 본원 본원이란 根本誓願의 준말로서 모든 부처님들이 지난 세상에서 성불하고자 뜻을 세운 여러가지의 서원을 말한다.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는데, 총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한 본원 곧 사홍서원이며, 별원은 부처님마다 중생 제도의 인연에 따라 세우신 바 아미타불의 48원이나 약사여래의 12원 등이다.
에 의해 수행하여 그것을 성취하였다. 정토행자는 무엇을 발원해야 하는가. 먼저 법장비구의 48대원을 통해 우리가 세워야할 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우리가 염하는 아미타불은 바로 眞如實相이요, 중생이 본래 갖춘 자성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이 성불 이전 법장보살 때 세운 48의 서원은 곧 사홍서원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삼세 모든 부처님의 서원인 동시에 성불을 지향한 우리 중생의 서원이요, 이상이기도 한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
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에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삼악도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수명이 다한 뒤에 다시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몸에서 찬란한 금색 광명이 빛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중생들의 모양이 한결같이 훌륭하지 않고 잘나고 못난이가 따로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숙명통을 얻어 백천억겁의 옛 일들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6.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백천억의 모든 세계를 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천이통(天耳通)을 얻어 백천억의 많은 부처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 모두를 간직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타심통(他心通)을 얻어 백천억 모든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신족통을 얻어 순식간에 배천억의 모든 나라들을 지나가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든 번뇌를 여이는 누진통을 얻지 못하고 망상을 일으켜 자신에 집착하는 분별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만약 성불하는 정정취(正定聚)에 머물지 못하고 마침내 열반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광명에 한량이 있어서 백천억의 모든 불국토를 비출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저의 수명이 한정되어 백천억겁 동안만 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성문들의 수효가 한량이 있어서 삼천대천세계의 성문과 연각들이 백천겁 동안 세어서 그 수를 알 수 있는 정도라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의 수명은 한량이 없으오리니. 다만 그들이 중생제도의 서원에 따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자재로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만약 그 수명에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좋지 않은 일은 물론이요 나쁜 이름이라도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들이 저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신심과 환희심을 내어 제 이름을 다만 열 번만 불러도 제 나라에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1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켜 모든 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불국토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울 때, 그들의 임종시에 제가 대중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마중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저의 불국토를 흠모하여 많은 선근공덕을 쌓고, 지성으로 저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마음을 회향할 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모두 32상(相)의 훌륭한 상호를 갖추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불국토의 보살들이 제 나라에 와서 태어난다면, 필경에 그들은 한 생만 지나면 반드시 부처가 되는 일생보처의 자리에 이르게 되오리다. 다만 그들의 소원에 따라, 중생을 위하여 큰 서원을 세우고 선근공덕을 쌓아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또는 모든 불국토에 다니며 보살의 행을 닦아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또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위없이 바르고 참다운 가르침을 세우고자 예사로운 순탄한 수행을 초월하여 짐짓, 보현보살의 공덕을 닦으려 하는 이들은 자재로 그 원행에 따를 것이오나, 다른 보살들이 일생보처에 이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입고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하여 한참 동안에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불국토에 두루 이를 수가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드리는 공덕을 세우려 할 때 그들이 바라는 모든 공양하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부처님의 일체 지혜를 연설할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천상의 금강역인 나라연과 같은 견고한 몸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과 일체 만물은 정결하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모양이 빼어나고 지극히 미묘함을 능히 측량할 수 없으오리니, 만약 천안통을 얻은 이가 그 이름과 수효를 헤아릴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을 비롯하여 공덕이 적은 이들까지도, 그 나라의 보리수 나무가 한없이 빛나고 그 높이가 4백만리나 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2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스스로 경을 읽고 외우며 또한 남에게 설법하는 변재와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0.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 보살들의 지혜와 변재가 한량이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불국토가 한없이 청정하여, 시방 일체의 무량무수한 모든 부처님세계를 모두 낱낱이 비쳐봄이 마치 맑은 거울로 얼굴을 비쳐보는 것과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지상이나 허공에 있는 모든 궁전이나 누각이나 흐르는 물이나 꽃과 나무나, 나라안에 있는 일체만물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보배와 백천가지의 향으로 이루어지고, 그 장엄하고 기묘함이 인간계나 천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으며, 그 미묘한 향기가 시방세계에 두루 풍기면, 보살들은 그 향기를 맡고 모두 부처님의 행을 닦게 되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불국토의 중생들로서, 저의 광명이 그들의 몸에 비치어 접촉한 이는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상냥하여 인간과 천상을 초월하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중생들이 제이름을 듣고, 보살의 무생법인과 깊은 지혜 공덕인 다라니 법문을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여인들이 제이름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 보리심을 일으키고 여자의 몸을 싫어한 이가 목숨을 마친 후에 다시금 여인이 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수명이 다한 후에도 만약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없고, 필경에 성불하지 못한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나 모든 부처님세계의 중생들이 제 이름을 듣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을 예배하며 환희심과 신심을 내어 보살행을 닦을 제, 모든 천신과 인간들이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의복을 얻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바로 훌륭한 옷이 저절로 입혀지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고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이나 물들이거나 빨래할 필요가 있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39.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누리는 상쾌한 즐거움이 일체 번뇌를 모두 여왼 비구와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0.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이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불국토를 보고자 하면, 그 소원대로 보배나무에서 모두 낱낱이 비쳐 보는 것이 마치, 맑은 거울에 그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1.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여러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부처님이 될 때까지 육근이 원만하여 불구자가 되는 일이 없으오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2.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은 이는 모두 청정한 해탈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러 한 생각 동안에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도 오히려 삼매를 잃지 않으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3.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도 수명이 다한 후에 존귀한 집에 태어자지 않는 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4.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이름을 듣고 한없이 기뻐하며 보살행을 닦아서 모는 공덕을 갖추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5.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들으면 그들은 모든 부처님을 두루 뵈올 수 있는 삼매를 얻을 것이며, 매양 이 삼매에 머물어 성불하기까지 언제나 불가사의한 일체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으오리니, 만일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6.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보살들은 듣고자 하는 법문을 소원대로 자연히 들을 수 있으로리니, 만약 그러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7.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듣고 나서 일체 공덕이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48.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만 듣고도 바로, 설법을 듣고 깨닫는 音響忍과 진리에 수순하는 柔順忍과 나지도 죽지도 않는 도리를 깨닫는 無生法忍을 성취하지 못하고, 모든 불법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법장비구는 중생구제를 위한 간절한 염원으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모두 이루어 극락정토를 완성하고 스스로는 아미타불이 되었다. 우리도 이와같은 원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염불행자의 서원으로는 사홍서원과 여래십대발원을 둘 수 있다. 이 외에도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는 서원을 세우기 바란다. 이를테면 병이 많은 사람을 위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병고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사람들 중에 베고픔으로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기를 발원합니다. 이 세상에 전쟁과 다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등.

영원토록 삼악도를 여의옵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탐진치를 어서 끊기 원하오며
한결같이 불법승을 듣기를 원하오며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기를 원하오며
한결같이 부처님법 배우기를 원하오며
변함없이 보리심 지키기를 원하오며
결정코 극락세계 태어나기 원하오며
하루속히 아미타불 만나뵙기 원하오며
온 세상에 나의 분신 두루하기 원하오며
한량없는 모든 중생 제도하기 원합니다.


3) 행(行)

아난아, 이렇듯 법장비구는 세자재왕부처님 앞에서 범천과 마왕과 용신 등 팔부대중과 그 밖에 많은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러한 48가지 원을 세우고 한결같이 뜻을 오로지 하여 불국정토를 건설하고자 굳은 결심을 하였느니라
그가 세우려는 불국토는 한없이 넓고 청정미묘하여 비할 데가 없으며, 또한 그 나라는 영원 불멸하여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쇠미하지 않는 곳이니라. 법장비구는 이러한 청정하고 장엄한 정토를 세우기 위해 다시 불가사의한 영겁의 오랜 세월 동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보살행을 닦았느니라. 그는 탐냄과 성냄과 남을 헤치는 생각은 내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감각기관의 대상인 모든 형상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촉감이나 분별하는 생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어려움을 참아내는 인욕의 행을 닦아 어떠한 고통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적은 욕심에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의 마음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물들지 않았으며, 항상 삼매에 잠겨서 밝은 지혜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었느니라.
남을 대할 때는 거짓과 아첨하는 마음이 없이 언제나 온화한 얼굴과 인자한 말로써 미리 중생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청정결백한 진리를 추구하여 모든 중생에게 은헤를 베풀었느니라.또한 그는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겼으며, 갖가지 수행을 쌓고 복과 지혜의 큰 장엄을 갖추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성취하게 하였느니라. <무량수경>

법장비구는 어떻게하여 48대원을 모두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루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동안에 수없는 보살행을 통해 가능했다. 애초부터 법장비구의 결심은 그 무엇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것이었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비구는 세자재왕 부처님께 정토를 이루는 수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세자재왕 부처님은 “비록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쉬지 않고 품어 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다하여 그 가운데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바닷물을 퍼내는 심정으로 보살행을 닦았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의 결심도 이러해야 한다. 내가 비록 무수한 세월동안 무명에 덮혀 있었으며, 이 세상이 탐진치 삼독으로 물들어 헤어날 날이 기약없지만 언젠가는 그 마음이 청정하고 이 땅이 청정할 정토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날을 향해 쉼없이 가야 한다. 법장비구의 본원이 아니었다면, 정토도 아미타불도 없었을 것이다. 법장비구의 48대원과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의 수행력에 의해 중생은 구원의 빛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비결은 바닷물을 퍼낸다는 세자재왕의 비유처럼 그렇게 지성으로 진리를 구한 때문이다. 거룩하고 거룩하셔라, 찬탄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네.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비록 우리의 행이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산골짜기 도랑물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다에 이르는 것은 의심할 일이 못된다. 다만 사람이 행하지 않고 좁은 소견으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뿐이다.
그렇다면 염불행자의 수행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무량수경>에는 삼배왕생의 길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상배는 출가사문이 되어 보리심을 발하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여러 가지 공덕을 닦아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라 하였다. 둘째, 중배의 사람은 재가의 신자로서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내고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염하며, 보시·지계 등 선근 공덕을 쌓아 이것을 회향하여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셋째 하배는 여러 가지 공덕을 쌓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고 생각을 오로지하여 다만 열 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염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다. 모두 보리심을 발하고 일념으로 염불해야 하며, 그 외에 공덕에 따라 상배와 중배, 하배로 나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먼저 세가지 복을 닦으라 권한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고, 지성으로 열가지 선업을 닦는 것이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계율을 지키며, 거동과 예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보리심을 일으켜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한편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힘써 권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16관법을 행한다. 16관법 중에 제14 상배관과 15 중배관, 16 하배관을 보면 중생이 근기가 각기 달라 수행하는 모습과 극락왕생하는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근기에 따라 지향해야 할 바를 알 수 있고, 하근기라하여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4) 아미타불

믿음의 원천인 아미타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아미타부처님은 이미 성불하신지 10겁이나 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설법하며 교화하고 계신다고 한다. 1겁이란 예를 들면, 둘레가 40리나 되는 돌산을 장수하는 사람이 백 년에 한 번씩 비단결 같은 얇은 옷으로 스쳐서 이 돌산을 없애도 아직 1겁이 안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1겁이란 실제로 무한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시간 속의 현재에 주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시는 ‘영원한 현재불’이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이와 같이 열반에 들지 않고 영원토록 중생을 교화하시는 부처님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수명이 무량하고 빛이 무량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사리불아, 그대 생각에 저 극락세계의 부처님을 어찌하여 아미타불이라 부르는지 아느냐? 사리불아,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두루 비추더라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하고, 또한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 나라 사람들의 수명이 한량이 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라 이름하느니라. <아미타경>

아미타부처님은 법장비구 때의 수행력에 의해 한량없는 위신력을 갖춘 부처님이 되었다. 그 위신력의 빛은 무량한 곳을 두루 비추고 계시니 그 빛을 만나면 고통이 사라지고 해탈을 얻는다. 또한 그렇게 하시기를 끝없는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고 또한 미래에도 계속하실 것이니 수명이 끝이 없다. 이렇게 수행을 통해 결과를 얻으신 부처님으로 아미타부처님을 보신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법신불이라고도 하고 화신불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현실에 나타난 화신불이건 수행의 과보를 보이신 보신불이든 진리 그 자체인 법신불이건 체성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부처님이란 나의 자성불이자 법신불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몰라 밖으로 부처를 찾을 뿐이니, 우리가 모든 생각과 반연을 끊고 일심으로 염불할 때 그 속에서 나는 거짓 나를 벗어나 진실한 나, 즉 부처와 하나가 된다. 망상의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의 진면목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죽어도 놓지 못하고 생을 거듭하며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터운 무명의 벽도 염불 공덕으로 무너져 내리고 부처의 광명이 빛을 발한다. 이때 현실에서 아미타불을 만나고 나의 본래면목을 발견하며, 정토에 왕생한다.

 

 

5) 극락정토

우리가 이루고자 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정토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정토왕생을 원해야 하고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① 정토의 정의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건립된 정토의 이름이 극락정토이며 흔히 극락세계라 하는데 범어 수하마제(須訶摩提)의 뜻 번역이다. 그런데 극락정토란 청정하고 안락한 국토의 뜻으로서 다섯가지 흐린 것(五濁)이 없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괴로움이 없으며, 오직 즐거움만 있는 세계로서, 생사윤회하는 삼계를 뛰어넘은 영원한 낙토(樂土)임을 경전에서는 찬탄하여 마지 않는다. 그래서 극락정토는 모든 불 · 보살이 수용하는 청정한 보토(報土)인 동시에 중생들 또한 번뇌 업장만 소멸하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 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실상의 경계인 것이다.
이렇듯 극락세계는 시간 · 공간을 초월한 영생의 세계인데도 경에는 십만억 국토를 지난 아득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번뇌에 때묻은 중생의 분상에는 실재하지 않는 꿈같은 세계이기 때문에 중생의 차원에 영합(迎合)한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임을 경전을 정독 음미할 때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범부의 망정(妄情)을 여윈 성자의 정견(正見)에는 사바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일지라도, 온갖 번뇌에 얽매이고 가지가지의 고액이 충만한 현실에 시달린 고해(苦海) 중생에게는 영생 안온한 극락세계란 역시 너무나 머나먼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필경 돌아가야 할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를 동경하고 흠모하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간절한 서원을 굳게 세우고, 한량없는 선근공덕을 쌓아야 할 것이다.ꡔ전통선의 향훈ꡕ 청화선사 법어집, 대한불교 금륜회편 p.375~376

정토란 맑고 깨끗한 땅으로 번뇌가 없는 곳이란 뜻이다. 번뇌가 있는 중생이 사는 곳이 예토이고 번뇌가 없는 불보살이 사는 곳이 정토이다. 그래서 정토를 불토 또는 불국토라고 한다. 따라서 정토란 사후에 가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한 마음 돌려 깨달으면 바로 정토에 남을 알아야 한다. 이 정토는 흔히 말하는 천상(천당, 천국)과는 달라 3계와 6도를 벗어난 곳이다. 천상은 6도 윤회 중의 최상의 곳으로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이곳도 업에 끌려가는 윤회의 세계이므로 복이 다하면 다시 3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정토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벗어났으며 6도 윤회를 벗어난 세계이므로 그곳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그곳은 고통이 없고 기쁨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극락이라고 하는데 이 즐거움도 천상의 즐거움이 비길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천상의 즐거움은 한계가 있는 즐거움으로 유루복에 그치지만 정토의 즐거움은 진리 속에서 나고 진리와 함께 하는 법락으로 무루복인 것이다. 따라서 천상의 복덕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공덕이 있으니 바로 성불의 터전인 것이다. 정토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의 법장비구의 48대원을 이룬 것이 정토이니 그것을 그대로 그려보면 될 것이다. 또한 <관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도 정토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정토란 한마디로 성불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그곳에 태어나면 성불이 보장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천상에 나기를 바라기 보다 정토에 왕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고 부처를 이루기를 마땅히 원해야 할 것이다.



② 유심정토와 타방정토

그렇다면 이러한 정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타방정토설과 유심정토설이 있다. 타방정토란 이 세상 밖 어느 곳에 정토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고, 유심정토란 우리 마음 밖에 따로 찾아야 할 정토는 없으며 마음이 청정하면 그 곳이 곧 정토라는 것이다.

유심불토라는 것은 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날 수 있는 곳이니, <여래부사의경계경>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따로 있는 바가 없고 오직 自心에 의지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의 현상임을 분명히 알아서 수순인(隨順忍 ; 화엄의 ‘十忍品’에 나오는 보살이 무명번뇌를 끊고 온갖 법이 본래 적연한 줄 깨달을 때 생기는 열 가지 安住心 가운데 第二忍. 따라서 忍은 認의 뜻이 있다. 이 忍은 지혜로 온갖 법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진리에 기꺼이 따름을 말한다)을 얻고는 혹은 초지에도 들며 몸을 버리고는 묘희세계에도 나며 혹은 극락의 정토에도 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을 알면 바야흐로 유심인 정토에 나거니와 경계에 집착하면 다못 반연하는 바의 경계 가운데만 떨어질 것이니, 이미 이와 같이 인과가 차이가 없는지라 곧 마음 밖에는 법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등의 문’과 ‘무생의 뜻’을 비록 교에 의지해서 믿기는 하지만 당인(當人) 스스로를 살펴보아 역량은 미흡하고 관력(觀力)은 얕으며 마음도 또한 분주히 들뜬다면 반연하는 바의 경계는 강하고 무시겁래로 사사로이 익혀 온 습기는 무거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러므로 이런 이들을 위해 제불께서 방편문을 베푸시었으니, 간절한 원력과 가피의 힘으로 모름지기 불국에 나서 인연따라 인력(因力)을 쉽게 이루고 속히 대승의 보살도를 행할 것을 권하신 것이다. 이를테면 <기신론>에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 올바른 믿음을 구하려 하나 마음이 성략(怯弱)하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뵙고 친히 공양하지 못할까 근심하기를 ‘신심을 성취하기 어렵다’ 하여 뜻이 물러나려 하는 이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섭호(攝護)하셨나니,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염하는 인연을 지으면 원(願)을 따라 타방불토에 득생하여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며 또한 악도를 기리 떠날 것이니, 이른바 수다라에 설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닦은 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상에 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뜻따라 곧 왕생하게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항상 부처님을 뵙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리니, 이와 같이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힌다면 반드시 원생함을 얻어서 정정(正定)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한 것 등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

유심정토와 타방정토 설을 모두 긍정하고 있다. 상근기 보살은 마음을 깨달아 정토에 나니 유심정토가 맞는 말이나, 하근기 중생은 마음을 깨닫기가 어려우므로 부처님이 방편으로 베푸신 타방정토에 의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로 상반될 것만 같은 유심정토와 타방정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다음의 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가 “내 마음 밖에 따로 정토가 없으니(唯心淨土), 10만억 찰 밖에 어찌 따로 정토가 있으랴” 하였다. 이 유심정토의 설은 원래 경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말만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는다면 그 뜻을 잘못 안 것이다. 대개 마음이 곧 경계로서 마음 밖에 경계가 없는 것이요, 경계가 곧 마음으로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계가 바로 마음이라면 어찌 굳이 마음에만 집착하여 경계를 배척할 수 있겠는가. 경계를 버리고 마음만을 주장하는 자는 마음을 깨닫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죽창수필 2집>

마음 밖에 경계가 없으니 또한 경계 밖에 마음이 없다. 이러한 마음과 경계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정토가 마음 안에 있느니 밖에 있느니를 따지는 것이다. 경계라는 것이 마음을 떠나 있을 수 없으나, 경계는 분명히 있으니 유심정토라고 하는 것과 타방정토라고 하는 것이 근기에 따른 구분임이 명백하다. 이것을 모르면서 부질없는 의심을 일으켜 이것저것 따져본 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서쪽으로 십만팔천리 밖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제자가 항상 보오니 승속간에 흔히 아미타불을 염하여 서방에 태어 나기를 원하옵는데 과연 저 곳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옵니까? 청컨대 화상께서는 이 의심을 풀어 주옵소서” 하고 자사가 또 여쭈었다.
“사군이여, 잘 들으라. 혜능이 말하리라. 세존께서 왕사성 안에 계실 적에 서방으로 인도 교화하는데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경문에 분명히 ‘여기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의 공간 거리로 말한다면 잇수로 10만 8천이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곧 몸 가운데 10악과 8사를 가리킨 것으로서 멀다는 말씀인 것이다. 멀다고 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함이고 가깝다 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함인 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지만 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미하고 깨달음이 다르기에 견해가 더딤과 빠름이 있나니 미한 사람은 염불해서 저 곳에 태어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제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도가 깨끗하다’ 하시니라.
사군이여,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는 것이요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치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니 동방 사람이 죄가 있을 때에는 염불함으로써 서방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니와 서방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염불하여서 어느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할 것이냐?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을 모르므로 제 몸 속의 정토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바 곳을 따라서 항상 안락하다’ 하셨느니라.
사군이여, 마음 자리에 착하지 않은 것만 없으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으려니와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염불을 해 봐도 태어나기 어려우니라. 내 이제 여러 선지식들에게 전하노니 먼저 10악을 없애는 것이 10만리를 가는 것이고 8사(邪)를 없애는 것이 8천리를 지낸 것이니 생각 생각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곧 바르게 행하면 이것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육조단경>

유심정토와 타방정토는 근기에 따른 설명의 차이일뿐 결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니, 낮은 소견으로 감히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밖에 경계가 없으니 마음이라고 해도 경계라고 해도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둘이 아닌 줄 알거니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본성을 깨닫고 모든 악을 여의면 곧 정토에 나려니와 10악과 8사10악은 10선(계율참고바람)의 반대이고 8사란 8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정, 정혜)의 반대이다. 이를 끊지 못하면 정토는 멀 수밖에 없다.

3. 염불의 갈래와 방법



1) 계율을 바탕으로

법장비구의 제18원에 따른 칭명염불이 극락 왕생을 위한 주된 수행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칭명염불 외에도 관무량수경에서는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생각하는 관상염불이 설해져 있고 실천행으로써 십선업과 발보리심 등을 권하였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선정쌍수에 의해 실상염불, 또는 염불선이 강조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염불수행법을 계율울 바탕으로 하나로 체계화시킨 것이 보조국사의 <염불요문>에 나오는 열가지 염불법이다. 십선업이란 계율수행에서 보았듯이 대승계율로써 신구의 삼업을 맑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조스님은 계율을 바탕으로 삼업을 청정히 한 후 염불수행이 가능하다는 열단계 염불법을 제시하였다.

아미타불의 큰 깨달음을 증득하려면 마땅히 열 가지 염불을 수행해야 합니다. 열 가지 염불이란 어떤 것입니까. 몸가짐의 염불인 계신(戒身)염불, 말가짐의 염불인 계구(戒口)염불, 마음가짐의 염불인 계의(戒意)염불, 움직이면서 하는 동억(動憶)염불, 움직이지 않고 하는 정억(靜憶)염불, 말하면서 하는 어지(語持)염불, 말하지 않고 하는 묵지(黙持)염불, 부처님 모습을 그리면서 하는 관상(觀想)염불, 무심하게 하는 무심(無心)염불, 부처님이 부처님을 염하는 진여(眞如)염불이 그것들입니다. 이 열 가지 염불은 모두 한결같은 참 깨달음의 자리에서 피어나 부처님과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더할 수 없이 지극한 수행법입니다.



① 계신염불
죽이고, 훔치고, 음행하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어 몸을 청정하게 해서 계율의 거울이 밝고 뚜렷해지게 합니다. 그런뒤로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서 합장하고 서쪽을 향해 마음 다해 공경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앉아 있음마저 없어져서, 앉아 있지 않을 때도 염하는 일이 한결같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신염불이라고 합니다.

② 계구염불
실없는 말, 속이는 말, 두 말, 험한 말짓들을 말끔히 없애고 입을 지켜 마음을 거둡니다. 몸을 맑히고 입을 깨끗이 한 뒤에 마음 다해 공경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입마저 없어져 입으로 부르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구염불이라고 합니다.



③ 계의염불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말끔히 없애고 뜻을 거두고 마음을 맑힙니다. 마음 거울에 번뇌의 때가 사라진 뒤에 마음 다해 깊게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마음마져 없어져 마음을 내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계의염불이라 합니다.

④ 동억염불
열 가지 모질고 나쁜 짓거리를 말끔히 없애고 열 가지 계를 올바로 지닙니다. 움직이고 오고 감의 한 틈에도 염불하고 찰라에도 염불하여 마음 다해 늘 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움직임이 다해서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동억염불이라 합니다.



⑤ 정억염불
저 열 가지 계율이 이미 깨끗해져서, 고요할 때나 일 없을 때나 깊은 밤 홀로 있을 때나 염불하는 마음이 한결같아 마음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고요함이 다해서 움직일 때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정억염불이라 합니다.

⑥ 어지염불
사람을 맞이해 말을 나누고, 아이를 부르며, 함께 일하고, 일을 시킴에 밖으로는 그런 일들을 따르되 안으로는 염불하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고요히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 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마침내 말이 없어져서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어지염불이라 합니다.


 

⑦ 묵지염불
입으로 부르면서 하는 염이 다하고 다해 생각의 때가 없는 염이 됩니다. 자나깨나 어둡지 않으며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늘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말없이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끝내 말없음마저 없어져 염하지 않을 때에도 스스로 염하는 일이 밝고 분명합니다. 이를 묵지염불이라 합니다.

 

⑧ 관상염불
저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며 묘한 광명 눈부신 금빛이 모든 중생들 앞에 두루 나타남을 관합니다. 또 부처님의 맑고 밝은 자비의 광명이 나의 몸과 마음을 비추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보이는 것 들리는 것들이 모두 부처님의 빛임을 밝게 깨달아서,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끝까지 염하되 그 수가 끝이 없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생각생각에 끊어짐이 없어 하루 내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늘 삼가고 늘 깨어서 찰나도 어둡지가 않습니다. 이를 관상염불이라 합니다.

 

⑨ 무심염불
염불하는 마음이 오래 되어 공을 이루면 차차로 무심삼매를 얻게 됩니다. 생각의 때가 없는 진실한 염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알음알이의 티끌이 없는 참 지혜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뚜렷해집니다. 받음이 없이 받아들이고 함이 없이 다 이룹니다. 이를 무심염불이라 합니다.

 

⑩ 진여염불
염불하는 마음이 이미 끝머리에 이르러 깨달음이 없이 깨닫습니다. 스스로 心, 意, 識이 본디 텅 빈 것임을 알아서, 한 가지 밝은 성품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자람 없는 깨달음의 큰 지혜가 밝고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진여염불이라 합니다.

염불하는 이치가 이와 같으니, 만약 먼저 열 가지 악과 저 여덟 가지 행복한 삶의 길인 팔정도에 맞서는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열 가지 계율의 맑고 깨끗함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몸이 맑고 깨끗하고 계율의 거울이 환히 밝지 않으면 어떻게 저 열 가지 염불법과 한 몸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몸을 맑고 깨끗하게 한 뒤에야 진리의 온갖 보배들을 쌓고 모을 수 있으며, 계율의 거울을 환히 밝게 한 뒤에야 부처님께서 자비의 빛을 드리워 주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뛰어난 맛을 지닌 제호를 얻더라도 보배 그릇이 아니면 그것을 담아 두기 어렵다” 그러니 염불하는 수행자가 몸이 청정하고 계율의 거울이 밝고 뚜렷하면 어떻게 진리의 기막힌 맛을 부처님만이 담아 지닐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요즈음 욕심투성이인 옳지 않은 무리들이 열 가지 악과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지 않고, 또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착함을 닦지 않고도 그릇된 앎과 혼자만의 생각으로 헛되이 염불수행법을 찾아 그릇된 바람들을 드러내 놓고 극락 세계에 태어나고자 합니다. 이것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는 염불수행을 한다고 생각할 지 몰라도 부처님의 뜻이야 어찌 그런 삿된 생각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쉼없이 파계하는 몸으로 순간 순간 부처님을 비방하면서도 되려 실없이 참되고 깨끗한 세계를 구하는 죄는 참으로 풀어 줄 수 없고 무겁기 그지없는 죄인 것입니다. 죽어 지옥에 떨어져 스스로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이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계율로 벗을 삼고 이제까지 밝힌 이치를 거울삼고 비춰보고, 먼저 열 가지 악과 여덟 가지 그릇됨을 끊고 이어서 다섯 가지 계율과 열 가지 착함을 굳게 지녀서 앞서 저지른 잘못들을 참회하고 깨달음의 열매 얻기를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짐과 더불어 힘쓰고 애쓰며, 나고 죽음을 벗어나겠다는 뜻을 야무지게 다져야 합니다. 해마다 선악의 업이 드러난다는 정월, 오월, 구월에 하는 수행을 닦듯이 염불수행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또 날씨가 엇바뀌는 여덟 절기마다 염불수행을 새롭고 새롭게 힘써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달마다 여섯 재일의 가르침을 본받아 저 열 가지 염불로 참 살림살이를 삼아야 합니다.
오래 공들이고, 있는 힘을 다 모아 저 진여염불과 하나를 이루면 날마다 시간마다 가고 오고 앉고 누움에 아미타불의 참 모습이 그윽히 앞에 나타나셔서 그대 머리 위에 향기로운 손을 얹으시고 길이 길이 피어나는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또 목숨을 마칠 때에 이르러서는 아미타 부처님께서 몸소 극락세계의 아홉 층 연꽃세계로 맞아들이사 반드시 가장 뛰어난 저 아홉번째 연꽃 세계에서 여러분을 맞으시고 길이길이 그 곳에 머물게 하실 것이니, 아, 부디 애쓰고 애쓰십시요.



2) 지명염불방법

여러 가지 염불법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 지명염불이다. 이것은 법장비구의 48대원 가운데 열 여덟 번째 원에 의거한 것으로, 후대 정토교가들은 이것을 ‘염불왕생원’이라하여 칭명염불을 극락왕생의 수행법으로 가장 중시하였다. 어떻게 이름만 불러서 정토왕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청화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원래 부처님인지라 또는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의 공덕을 거기에 간직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 이름도, 그 사람 이름을 자꾸만 부르게 되면 그 사람 영상이 떠오르는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우리가 본래 부처인 동시에 부처님의 공덕을 거기에 다 간직한 이름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란 말입니다. 우리 같은 김아무개, 누구 아무개 이것은 부사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지마는,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공덕을 거기에 갊아있게(藏) 담게시리 만든 진리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우리의 업장이 녹아져 옵니다. 또 우리가 본래 부처고 말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더 심어지고, 업장 종자는 차근차근 감소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한결 강해지고 드디어는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는 성불하게 되겠지요. 원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만 해도 성불한다는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하였다.(ꡔ전통선의 향훈ꡕ)
지명염불의 공덕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앞서 보조스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하지 않고 입으로만 염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에 대해 휴정스님도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그 한 생각 한 소리에 능히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80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청허 휴정스님 청어당집)고 하였다.
지명염불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염불할 때의 환경이나 심경, 혹은 염불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 적절한 염불하는 방법이 갖가지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방법마다 모두 나름대로의 작용과 특징이 있으니, 행인이 염불할 때 아래에 열거한 적합한 방법을 스스로 잘 선택하여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으로 염불할 때 이것으로는 그 당시의 심경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도 해로울 것은 없다. 다만 그 상황에서 능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망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비유하면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병을 치료하기에 좋은 것이 곧 양약인 것과 같은 것이니, 중생의 망념이 병이요, 부처님의 명호가 약이요, 염불하는 것이 바로 묘약을 먹는 것이다. 이하 ꡔ정법개술ꡕ에서 인용한다. 매우 구체적이고 다양한 염불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으니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① 고성념(高聲念)
염불할 때 큰 소리로 전신의 힘을 다하여 ‘나무아무타불’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운을 소모하고 목을 쉬게 하므로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다만 혼침과 게으름을 대치하여 계속 일어나는 잡념을 제거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행자가 염불할 때 혼혼하여 잠이 오려 하거나 생각이 흐리멍텅하면 용맹스럽게 정신을 차려 큰 소리로 또렷또렷하게 염하면 금방 머리가 개운하고 정념이 회복되어 전과 같이 무궁한 활력과 강력한 작용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이며, 아울러 곁에서 이 소리를 듣는 자로 하여금 염불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옛날 영명 선사가 항주 남병산에서 염불할 때, 산 아래 길 가는 사람이 그 소리가 천락(天樂)이 허공에서 울리 듯 분명하고 크게 들려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니, 바로 이 염불 방법을 쓴 것이다.


② 묵념(默念)
염불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 소리는 내지 않으나 ‘나무아무타불’하고 염하는 것은 행자의 심식 중에서 분명하고 또렷또렷하므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정념이 한 덩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소리를 내는 것에 비하여 부족함이 없다. 이 방법은 누워 있을 때나 목욕할 때나 병이 들었을 때나 변소 갈 때 등에 적합하며, 그 외 소리를 내기에 불편한 상황이나 공공 장소에서 적합하다 하겠다.



③ 금강념(金剛念)
염불할 때 음성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중간으로 하되, 한편 염하면서 한편 그 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는다. 넉 자(아미타불)나 여섯 자(나무아미타불)를 막론하고 한 자 한 자를 분명히 염하고 들으면, 생각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고 자연히 마음이 안정된다. 이 염법은 효력이 매우 크므로 금강에 비유한 것이다. 금은 긴밀함을 비유하였으니, 긴밀하면 외경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요, 강은 견고함을 비유하였으니, 견고하면 잡념이 능히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종 염불방법 중에서 이것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④ 각조념(覺照念)
염불할 때 한편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자성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나의 마음과 불심, 나의 몸과 불신이 한 덩이가 되어 환하고 또렷또렷히 시방에 꽉차며, 모든 산하대지의 방사나 기구가 일시에 소재(所在)를 잃어버리며, 내지 자기의 사대색신도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되면 보신이 죽기 전에 이미 적광을 증득하며 불호를 처음 부를 때 곧 삼매에 들어가서 범부의 몸으로 부처님의 경계에 참예할 수 있으니, 이보다 빠른 법은 없을 것이다. 애석한 것은 상상근인이 아니면 능히 깨닫고 실행할 수 없으므로 제도할 수 있는 근기가 비교적 좁은 것이 흠이라 할 것이다.

⑤ 관상념(觀想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한편으로 부처님의 존엄한 신상이 분명히 나의 앞에 서 계시면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어루만지시기도 하고 혹은 옷으로 나의 몸을 덮어주시는 것을 관상하는 방법이다. 또한 관음세지가 부처님 곁에 서 계시며 현성(賢聖)이 나를 위요(圍繞)함을 관상하며, 혹은 극락국의 금지(金池)와 보지(寶池), 화개(花開), 조명(鳥鳴), 보수(寶樹), 라망(羅網) 등이 빛나고 화려한 것을 관상한다. 만약 관상이 깊어지면 몸이 그대로 극락국토에 노닐 것이요, 설사 깊지 못하더라도 염불의 조연(助緣)이 되어 정업(淨業)을 성취하기에 손쉬울 것이다. 만약 오래오래 관하고 성숙하게 하여 평소에도 심목(心目) 중에 또렷이 있어서 하루 아침에 보체(報體)가 죽더라도 차방 진연(塵緣)에 끌리지 아니하면, 극락국의 승경(勝境)이 일제히 앞에 나타날 것이다.



⑥ 추정념(追頂念)
염불할 때 위의 금강념과 같은 방법을 쓰되, 다만 글자와 글자 사이와 글구와 글구 사이를 연속하여 지극히 긴밀하게 하여, 한 글자가 한 글자를 뒤쫓으며 한 글구가 한 글구를 이어서 중간에 조그마한 틈도 없이 함으로 추정념이라 말한다. 이렇게 앞을 뒤쫓아 서로 긴밀하게 하여 조그마한 틈도 두지 않기 때문에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다. 이 법으로 염불할 때는 정신이 긴장하고 마음과 입이 항진(亢進)하여 정념으로 하여금 잠깐 사이에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염법은 효력이 지대하므로 정업행인이 흔히 이 방법을 채용한다.

⑦ 예배념(禮拜念)
염불할 때 한편으로 염불하면서 한편으로 절을 하는 방법이다. 다만 일구를 염하고 한 번 절하거나, 자구는 상관하지 않고 염하면서 절하고, 절하면서 염하여 염과 절을 병행하여 몸과 입을 합하게 하며, 게다가 마음 속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삼업이 집중하고 육근이 모두 섭수하게 된다. 이 방법은 우리 몸에서 능히 작용을 발생하는 기관을 모두 염불하는데 쏟아넣어 염불 이 외의 일이나 염불 이 외의 생각은 조금도 용납치 않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특별한 정진이므로 효력도 특별히 크다. 다만 절을 오래하면 몸도 피로하고 숨도 차므로 다른 방법과 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이 방법만을 전용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⑧ 기십념(記十念)
염불할 때 염주로써 수를 헤아리되, 열 번 불호를 염하고 한 알의 염주를 넘기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염불을 하면서 수를 기억해야 하므로 전념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념해 지는 것이요, 만약 전념하지 않을 때는 수목(數目)이 착란해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억지로 전념하게 하는 방편이므로 잡념을 퇴치하는 데에 지극한 공효(功效)가 있다.


 

⑨ 십구기념(十口氣念)
염불할 때 다만 추정법을 써서 염하되, 한 번 숨을 들이마셔서 내뿜을 때까지 계속 염불을 하는 것을 일구념이라 하고, 이와 같이 열 번 하는 것을 십구기라 한다. 이 방법은 염불할 여가가 없이 매우 바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시설한 방편법으로, 십구기를 마칠 때까지는 대략 5분 남짓 소요된다. 이렇게 매일 한 번씩만 십구기를 하여도 능히 극락국에 왕생할 수 있으니, 비록 매우 바쁜 사람일지라도 능히 이렇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타 제18원에 ‘시방 중생이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서 십념만 하고서도 만약 왕생치 못하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한 원문(願文)을 근거하여 시설한 것이다. 고인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소위 십념이란 곧 십구기를 두고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부처님의 원력이 매우 광대하며 정토법이 또한 매우 진실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러므로 비록 십념만 하더라도 임종에 부처님이 와서 반드시 영접하는 것이다.

⑩ 정과념(定課念)
염불하는 데 있어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처음은 부지런히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나태하여 항심(恒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금의 행인이 염불할 때에 하루에 일정한 양을 정해놓고 어김없이 실행함으로 해서 도심이 물러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불호의 양에는 구애됨이 없이 고인들은 매일 십만념 혹은 칠만, 오만 등을 정해놓고 항상 이를 실천하였으니, 그 정진력을 알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이 방법은 환경과 자신의 역량을 참작하여 일정한 양을 정하되, 한 번 정한 후에는 어떤 바쁜일을 막론하고 기필코 정한 수를 채워야 할 것이요, 부득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다음날 반드시 부족한 양을 채워서 염불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만약 처음 시작할 때는 용기 백배하여 너무 많은 양을 정했다가 뒤에 가서는 감당치 못하면 이것도 좋지 않으며, 처음부터 너무 적게 정하면 나태하기 쉬우므로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양을 결정할 때는 자세히 요량해야 할 것이다.

⑪ 사위의중개념(四威儀中皆念)
행자가 정종(淨種)이 순숙해지면 염불이 저절로 정진이 되어 양을 정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양을 정한 외에 낮이나 밤이나 상관없이 잠들기 전에는 거의 염하지 않을 때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위의중개념으로서, 이렇게 오래하여 습관이 되면 일구의 미타가 영원히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고인의 왕생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대장장이는 쇠를 두들기면서 염불을 끊이지 않았으며, 어떤 두부장수는 콩을 갈면서 염불을 잃지 않더니, 최후 염불소리가 끊어지면서 그대로 서서 죽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우리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정도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양을 정하든 정하지 않든 그런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⑫ 염불념개념(念佛念皆念)
위에서 말한 사위의중개념은 구념을 가리킨 것이나, 여기서 말하는 염불념개념의 개념의 염자는 심념(心念)을 지적한 것이다. 곧 입으로 염하거나 입으로 염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염불하고 있으며, 입으로 염불하지 않을 때에도 심중에서 염불하는 것이니, 곧 지명 외에 관상이나 관조할 때에도 바로 지명 중에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단지 구념할 때만 관상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행자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면, 어느 때 어느 경우와, 입으로 염하든 입으로 염하지 않든 관계없이 심중에서 늘 부처님을 생각하여, 정념이 견고하기가 철벽과 같아서 바람이 불어도 들어올 틈이 없고, 차 넘어뜨리려 하여도 파괴되지 않아서 조그만한 세념(細念)이나 잡념도 없을 것이다. 이때는 염불삼매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져서 저 국토에 태어나는 것은 마치 보증서를 받아 둔 듯하리라.
고인이 말하기를 ‘염하되 염하지 않으며, 염하지 않으면서 염한다’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경계이다.
만약 염불한 지가 오래되고 공행이 순숙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초학자가 능히 행할 수 있는 법은 아니다.



3) 십념의 방법

이상은 ꡔ정법개술ꡕ을 인용한 것으로 더 이상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다양한 염불법이 제시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지명염불의 근간이 되는 10념에 대해서만 설명을 더 하고자 한다.

하품하생하는 이란 매양 악업을 짓는 중생으로서, 오역죄와 십악 등 가지가지의 악을 지어 그 무거운 죄업의 과보로, 응당 지옥 · 아귀 · 축생 등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 동안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을 사람을 말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도 목숨이 다하려 할 때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선지식이 그를 위하여 여러가지로 안위하여 주고 미묘한 법문을 들려주어 지성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가르쳐주느니라. 그러나 그는 괴로움이 극심하여 부처님을 생각할 경황이 없느니라. 그래서 선지식은 다시 그에게 ‘그대가 만약 부처님을 생각할 수가 없다면 다만 아미타불을 부르도록 하여라’고 타이르니라. 그래서 이 사람이 지성으로 소리를 끊이지 않고 아미타불을 열 번만 온전히 부르면, 그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염불하는 동안에 80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무거운 죄업을 없애느니라. 그리고 목숨을 마칠 때는 마치 태양과 같은 찬란한 황금의 연꽃이 그 사람 앞에 나타나, 그는 순식간에 바로 극락 세계의 보배 연못 연꽃 속에 태어나느니라. <관무량수경>

이 경에서 하배의 십념을 말하였는데, 그 말 속에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른바 현료의(顯了義)와 은밀의(隱密義)이다. 은밀의란 제3대(對)의 순정토(純淨土)의 과에 의해 십념의 공덕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彌勒發問經>에 말한 것과 같다. 즉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공덕 이익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십념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 그 부처님을 생각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범부의 생각이 아니요 나쁜 생각이 아니며 잡된 번뇌의 생각이 아니니, 만일 그런 생각을 두루 갖추면 곧 안양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무릇 십념이 있으니 그 십념이란 이른바, 첫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고 모든 중생에 대해 그 행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그 행을 비방하면 끝내 왕생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칠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보호할 마음을 일으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인욕하는 가운데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신심이 청정하여 이양(利養)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늘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아만을 버리고 겸손한 말을 쓰는 것이며, 여덟째는 세속 이야기에 맛을 붙이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각의(覺意)을 가까이 하여 갖가지 선근의 인연을 깊이 일으키고 시끄럽고 산란한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열째는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하면서 모든 감관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기를 “이런 십념을 가지면 이미 범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초지(初地) 이상 보살이라야 십념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며 순정한 국토에 대한 하배의 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은밀의의 십념이라 한다.” 현료의의 십념의 모양을 나타낸다는 것은 제4대(對)의 정토를 잡아 말하는 것이니, 이 <관경>에 “하품하생이란 어떤 중생이 오역 십악 등 갖가지 악업을 갖춰 짓다가 임종 때에 이루러 선지식을 만나면...이와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끊어지지 않게 하며, 십념을 갖추어 나무불이라고 일컫는데.....”. 어떤 마음을 지극한 마음이라 하며 어떤 것을 십념의 계속이라 하는가.
구마라집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나쁜 도적이 창을 휘두르거나 칼을 빼어 들고 곧 쫓아와 죽이려 하자 그는 부지런히 달아나다가 한 강에 이르렀는데, 만일 그 강을 건너지 못하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웠다. 그때 그는 다만 그 강을 건널 방편만을 생각한다. 즉 ‘나는 지금 강가에 이르렀다. 옷을 입고 건너야 할까? 옷을 벗고 건너야 할까? 옷을 입고는 건널 수 없고 옷을 벗으려 해도 그럴 겨를이 없다.’ 오직 이 생각만 있고 다른 생각이 없어, 강을 건너려는 생각은 곧 그 일념 뿐이니 이런 십념에는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부처님 명호를 생각하거나 부처님 상호를 생각하거나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여 십념에 이르러야 하나니, 이런 지극한 마음을 십념이라 하며 이것이 곧 현료의 십념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무량수경종요>

평상시 악업만 짓던 사람이 임종시에 십념만으로 왕생한다고 하니 어떻게 십념을 해야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 원효스님은 현료의와 은밀의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은밀으로서 열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현료의로서 지극하기만 하면 십념을 갖춘 것이라고 하였다. 하기야 죽음을 눈앞에 두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급하겠는가. 그때 간절한 그 십념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시에는 정신이 혼미하여 이런 바른 생각을 내기 어렵다. 또한 정신차릴 경황도 없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질병의 고통과 싸우느라고 마음을 모을 수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임종시에 일념으로 염불할 수 있으려면 평상시에 극락왕생의 원을 세우고 늘상 입에서나 마음에서 염불을 놓치지 말아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죽음이 늙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이하게 세월을 보내며 염불은 나이가 더 들면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생사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노소를 불문하고 때어나면 곧 죽음과 가까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4) 관상염불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거나 공덕을 생각하는 염불방법으로 <관무량수경>에는 극락왕생을 위한 16관법이 제시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대표적인 몇가지 관법만 소개하고자 한다.



① 해를 생각하는 관(日想觀)
부처님께서 위제히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부인과 중생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한곳에 집중시켜 서쪽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중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아니니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것을 볼 것이므로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않아서 해를 똑똑히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마음을 굳게 간직하여 생각을 움직이지 말고, 곧 지려는 해를 보고 난 후에도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영상이 한결같이 분명히 보이도록 하시오. 이것을 해를 관하는 일상관이라 하고 최초의 관이라 합니다.”

 


형상 생각하는 관(像想觀)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히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연화대를 관했으면 다음에는 부처님을 생각하여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진리이고 그 장용인 법계신(法界身)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의 마음 속에도 들어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의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의 32상의 뛰어난 모습이 되고 80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느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루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바른 지혜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땅히 일심으로 생각을 골똘히하여 아미타불과 그 지혜공덕인 여래, 응공, 정변지를 깊이 관해야 하느니라.
아미타불을 관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부처님의 형상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눈을 뜨거나 감거나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염부단금의 자마금색과 같이 찬란한 하나의 부처님 형상이 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은 부처님의 형상을 보고 나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저 극락세계의 칠보로 장엄된 보배 땅과 보배 연못과 줄지어 서 있는 보배 나무와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천상의 보배 휘장과 또한 온갖 보배로 아롱진 보배 그물이 허공에 가득함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니라. 그리고 이러한 영상을 마치 자기 손바닥을 보듯이 더욱 뚜렷하게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이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한 송이의 커다란 연꽃이 부처님 상(像)의 왼편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것은 부처님 상의 연꽃과 같아서 조금도 다르지 않느니라. 또한 그와 똑같은 연꽃이 또 한 송이 부처님 상의 오른편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한 관세음보살의 상이 왼쪽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한 대세지보살의 상이 오른쪽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그 금색 광명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상과 같음을 생각하여라.
그리하여 이러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부처님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은 모두 광명을 발하느니라. 그래서 그 찬란한 금색 광명은 모든 보배 나무를 비추느니라. 그리고 그 낱낱 보배 나무 밑에는 또한, 세 송이의 큰 연꽃이 있고 연꽃 위에는 각각 한 부처님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이 있는데, 이렇듯 아미타불의 상과 두 보살의 상이 저 극락세계에 두루 가득하느니라.
그리하여 이와 같은 생각이 성취되었을 때, 관(觀)하는 수행자는 극락세계의 흐르는 물과 광명과 모든 보배 나무와 기러기와 원앙새 등이 모두 미묘한 법문을 아뢰고 있음을 알아듣게 되느니라.
그래서 선정에 들 때나 선정에서 나올 때나 항상 미묘한 법문을 들을 것이니, 수행자는 선정에 들었을 때 들은 바를 잘 기억하였다가, 선정에서 나온 뒤에 경전의 가르침과 맞춰보도록 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만약 경전과 맞지 않으면 이를 망상이라 하고 경전과 합당하면 이를 거친 생각으로 극락세계를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런데 이와 같이 부처님과 보살의 형상을 생각하고 관조함을 상상관(像想觀)이라 하고 또한 여덟째 관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러한 관조를 하는 사람은 무량 억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악업을 없애고 현재의 이 몸으로 염불삼매를 얻게 되느니라.

③ 부처님 몸 생각하는 관(眞身觀)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다음에는 아미타불의 몸과 그 광명을 관조하여라. 아난아, 잘 알아 두어라. 아미타불의 몸은 백천만억 야마천의 자마금색과 같이 빛나고, 부처님의 키는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니라. 그리고 미간의 백호는 오른쪽으로 우아하게 돌고 있는데 마치 다섯 수미산을 합한 것과 같고, 부처님의 눈은 사대해(四大海)의 바닷물처럼 그윽하여 푸르고 흰 동자가 분명하느니라.
몸의 모든 모공에서는 수미산과 같은 큰 광명이 흘러나오고 부처님의 원광은 백억 삼천대천세계와 같으니라. 그리고 그 원광 속에는 백만억 나유타 항하사의 화신불이 계시고 그 화신불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보살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그리고 아미타불에게는 8만 4천 가지의 상(相)이 있고, 그 하나하나의 상에는 각각 8만 4천의 수형호가 있으며, 그 낱낱 수형호마다 또한 8만 4천의 광명이 있느니라. 그리고 그 광명은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중생들을 받아들여 그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모든 광명과 상호와 화신불을 이루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다만 깊이깊이 생각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도록 하여라.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으므로 염불삼매라 하느니라. 그래서 이와 같이 관조함을 ‘모든 부처님의 몸을 관한다’고 말하느니라. 그런데 부처님의 몸을 볼 수 있으면 또한 부처님의 마음도 볼 수 있는 것이니, 부처님의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바로 대자대비이며 모든 부처님들은 이러한 무연자비(無緣慈悲)로써 모든 중생을 섭수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은 내생에는 여러 부처님의 회상에 태어나, 생사를 깨닫는 무생법인을 얻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오로지 하여 착실히 아미타불을 관조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아미타불을 관조할 때는 한 가지 상호로부터 보아들어가야 하는데, 오직 미간 백호만을 관조하여 그 영상이 분명하도록 관하기도 하느니라. 그래서 미간 백호를 볼 수 있으면 부처님의 8만 4천 상호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데 이렇듯 아미타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느니라. 또한 무수한 부처님을 볼 수 있으므로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한다는 수기(授記)를 받게 되느니라. 이러한 것을 일체 부처님의 몸을 관조하는 진신관(眞身觀)이라 하고 또한 아홉째 관이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이 관조함을 바른 정관(正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邪觀)이라 하느니라.”



④ 관세음보살 생각하는 관(觀音觀)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과 위제희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아미타불을 분명하게 뵈온 다음에는 관세음보살을 관조하여라. 이 보살은 키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몸은 자마금색으로 빛나고, 정수리에는 상투같이 솟은 육계가 있으며, 목에는 원광이 있는데, 그 지름이 백천 유순이나 되느니라. 그 원광 속에는 5백의 화신불이 계시는데 모두 나(석가모니불)와 같으니라. 그리고 한 분의 화신불마다 각기 5백의 화신보살과 헤아릴 수 없는 천인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온 몸에서 발하는 광명 속에는 지옥 · 아귀 · 축생 · 인간 · 천상 등 오도 중생의 일체 모든 현상이 나타나 있느니라.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에는 마니보주로 된 천관(天冠)이 있고 그 천관 속에는 화신불 한 분이 서 계시는데, 높이가 25 유순이니라.
관세음보살의 얼굴은 자마금색으로 빛나고 미간의 백호는 칠보의 빛깔을 지녔는데, 8만 4천의 광명이 흘러나오느니라. 그리고 그 낱낱 광명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신불이 계시는데, 그 화신불들은 또한 각기 수없이 많은 화신보살들이 모시고 있느니라. 이와같이 자재로 변화하여 시방세계에 가득함이 마치 찬란한 붉은 연꽃이 수없이 피어 있는 것과 같으니라.
또한 관세음보살은 80억 광명으로 된 영락 목걸이를 걸고 있는데, 그 영락 구슬 속에는 모든 장엄한 일들이 모조리 나타나 있느니라. 그 손바닥은 5백억 가지 연꽃 빛을 띠고 그 손가락 끝마다 8만 4천의 그림 무늬가 있는데, 마치 도장의 인주과 같으니라. 그 그림 무늬마다 8만 4천의 빛깔이 있고 빛깔마다 또한 8만 4천의 광명이 있느니라. 그런데 그 광명은 부드럽고 상냥하여 두루 모든 것을 비추는데,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보배 손으로 중생들을 인도하느니라.
또한 관세음보살이 발을 들 적에는 발바닥에 있는 천복륜(千輻輪)의 발금이 저절로 오백억의 광명대로 변화하고 발을 디디면 그것이 금광마니 보(寶)의 꽃으로 변하여 온 땅 위에 흩어져 그득하게 되느니라.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모든 상호는 부처님과 똑같이 갖추어져서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다만 정수리에 솟은 육계와 육계 속에 아무도 볼 수 없는 정점(頂點)인 무견정상(無見頂上)만이 부처님에게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와같이 관함을 관세음보살의 몸을 관하는 관음진신관이라 하고 또한 열째 관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다시 이르시기를,
“만약 관세음보살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말한 것과 같이 관조해야하느니라. 이러한 관을 하는 사람은 모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업장을 말끔히 소멸하여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겁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없애느니라.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다만 그 이름만을 들어도 무량한 복을 얻을 수 있는데 하물며 그 모습을 분명히 관조하는 큰 공덕에 있어서랴.
그런데 만약 관세음보살을 관조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정수리의 육계를 관하고 다음에는 천관(天冠)을 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상호를 차례차례로 관조하되 뚜렷하기가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이 분명히 해야 하느니라. 이와같이 관조함을 바른 정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이라 하느니라.



⑤ 대세지보살 생각하는 관(勢至觀)
다음에는 대세지보살을 관조하여라. 이 보살의 크기는 관세음보살과 같으며 그 원광의 지름은 125유순이며 250유순을 비추느니라. 온 몸에서 발하는 광명은 자마금색으로서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비추는데 인연이 있는 중생들은 다 볼 수 있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의 한 모공에서 나오는 광명만 보아도 시방세계의 무량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하고 미묘한 광명을 볼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의 이름을 끝없는 광명인 무변광(無邊光)이라 말하며 또한 지혜의 광명으로써 두루 일체 중생을 비추어 지옥 · 아귀 · 축생 등 삼악도의 고난을 여의게 하는 위없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보살을 큰 힘을 얻은 이, 곧 대세지라 하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의 보배관은 오백 가지의 보배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하나하나의 보배 꽃마다 또한 5백의 보배 꽃받침이 있는데, 그 낱낱의 꽃받침에는 시방세계의 모든 청정 미묘한 불국토의 광대한 모양이 나타나 있느니라. 또한 정수리의 육계는 찬란한 홍련화와 같으며, 그 위에 하나의 보배 병이 있는데, 온갖 광명이 가득하여 두루 부처님 일을 나투고 있느니라. 그리고 이 밖에 여러 가지 몸의 형상은 관세음보살과 다름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 보살이 다닐 적에는 시방세계의 일체 모든 것이 진동하며, 진동하는 곳마다 바로 5백억의 보배 꽃이 피고, 꽃마다 크고 장엄함이 극락세계와 같으니라. 또한 이 보살이 앉을 때에는 칠보로 된 국토가 일시에 흔들리는데 그것은 아래쪽의 금광불 국토에서 위에 있는 광명불 국토까지 이르느니라. 그리고 그 중간에는 무량 무수한 아미타불의 분신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분신들이 구름같이 극락세계에 모여 허공 가득히 연화대에 앉아서 미묘한 불법을 연설하여 고해 중생을 제도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관조함을 정관이라 하고 달리 관함을 그릇된 사관이라 하느니라. 또한 이러한 것이 대세지보살의 색신을 생각하는 관이며 열 한번째의 관이니라. 그리고 이 대세지보살을 관조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아승지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없애며, 또한 다시는 태중(胎中)에 들지 않고, 언제나 모든 부처님의 청정 미묘한 국토에 노닐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관이 성취되면 온전히,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느니라.”

4) 일상생활에서

염불행자는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해야 할 것이다. 편안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놓아야 한다. 욕심을 떠난 사람은 저절로 편안함을 얻는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야 오로지 염불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일심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급할 때만 불보살님을 찾다가 곧 잊어버리기를 반복하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해야 할 것이다.

혜원스님은 사람들에게 사바세계를 버리고 정토를 구하기를 권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보면 “금과 은은 마음을 더럽히는 더러운 물건이요, 벼슬은 몸을 얽어매는 고구(苦具)와 같은 것입니다. 여색은 목숨을 뺏는 도끼와 같은 것이며,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전원과 옥택 따위는 모두 삼계에 떨어지게 하는 함정입니다. 오직 인간 세상을 벗어나 연화회상에 태어나기를 기원합시다. 더 무엇을 흠모하고 부러워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전에 <在家眞實修行文>이라는 글을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권한 적이 있거니와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진실로 수행하려는 자는 굳이 무리를 짓거나 모임을 만들 것은 아니다. 집안에 조용한 방이 있을 것이니, 그 곳에서 문을 닫고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굳이 스님들에게만 공양할 것은 아니다. 집안에 부모가 계실 것이니 효순한 마음으로 봉양하면서 염불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꼭 밖으로 나돌며 강의를 들으려 할 것은 아니다. 집에 경전이 있을 것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오직 절에만 시주할 것은 아니다. 가난한 친척과 이웃에게도 두루 베풀면서 염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죽창수필 2집>

염불행자는 우선 생활이 검소 검약할 것이며, 결코 세속적 욕망를 쫓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염불을 할뿐이지 굳이 밖으로 찾아 유난스럽게 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직장동료들에게 그들의 뜻에 효순하고 친절과 보시를 베풀어 화합하여 내가 있는 곳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속에서 염불수행도 익어갈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수행따로 생활 따로 인 사람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염불을 해도 마음에 전혀 변화가 없다. 오히려, 나는 염불한다는 상을 가지고 염불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일상생활은 하찮은 것이라 여겨 아만만 쌓고 주변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무관심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을 수행이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는 이기적인 반응을 하기 쉽다. 즉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걸림없이 사는 모습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하고 신비한 체험들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열반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특히 염불은 부처를 생각하고 정토를 생각하여 내 모습이 부처를 닮아 가고 내가 서있는 곳에서 정토를 일구는 수행이 되어야 한다.


4. 염불수행의 공덕

염불은 불보살의 위신력에 감응하는 수행법이므로 다른 수행법과 비교할 수 없는 현실적인 위력이 있다. 염불의 이러한 위력 때문에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많은 중생들에게 기도성취의 문이 되었고, 수행자들에게는 수행시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는 대치법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칭명염불에 대한 공덕은 많은 선지식들에 의해 강조되곤 하였다.

존호를 염하는 가르침은 경전에 널리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한번만이라도 염하면 진사겁(塵沙劫)의 죄를 소멸하고 십념(十念)을 갖추면 몸이 정토에 나서 영원히 위급한 환난을 구제하는 것이다. 업장이 녹고 원액(寃厄)을 소멸하여 길이 고통의 나루를 헤어날 뿐만 아니라 이 인연을 의탁한다면 마침내는 각해(覺海)에 도달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도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중에 들어가서 단 한번 ‘나무불’을 일컬을지라도 모두가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불도를 이루게 된다” 하였고 또 “부처님의 명호를 받들어 지니는 이는 누구나 제불께서 호념하여 주신다”고 한 것이다.
<보적경>에서는 “높은 소리로 염불하면 마군들이 모두 두려워 흩어진다” 하였고 <문수반야경>에서는 “수행하는 이가 스스로 우둔해서 능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다만 생각과 소리만 계속 이어지게 하라. 그래도 반드시 불국토에 왕생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또 <대품경>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염불을 한다면 곧 고액이 없어지고 그 복이 다함 없는데 이를 것이다” 하였고, <증일아함경>에는 “한 염부제의 온갖 중생을 사사(四事)로 이바지한다면 공덕이 한량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착한 마음이 계속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염한다면 그의 공덕됨은 위의 비유를 훨씬 지나서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화엄경>에는 “자재한 마음이 염불문에 머무르면 자기 마음에 있는 즐기고 싶은 것을 가히 따름을 알 것이니 온갖 부처님께서 언제나 그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비석화상의 <염불삼매보왕론>에는 “큰 바다에서 목욕한 사람은 이미 온갖 냇물을 다 쓴 것과 같이 부처님의 명호를 염하는 사람은 반드시 온갖 삼매를 한꺼번에 이루는 것이다. 또 마치 수정주를 탁한 물에다 넣으면 아무리 탁한 물이라도 맑아지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어지러운 마음에다 염불을 던지면 아무리 어지러운 마음이라도 부처를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이 계합되었다면 또한 마음이나 부처랄 것이 없나니, 함께 없어짐(雙亡)은 곧 정(定)이요 함께 비추임(雙照)은 곧 혜(慧)다. 정혜가 이렇게 균등하다면 다시 어떤 마음인들 부처가 아니겠으며 어떤 부처인들 이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렇다면 어떤 경계, 어떤 반연일지라도 모두가 삼매 아님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누가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높은 소리로 염불한다고 다시 근심하리오.
그러므로 <업보차별경>에서는 고성으로 염불하고 송경(誦經)하는 수행에 열 가지의 공덕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능히 졸음을 막고, 하늘의 마군이 놀래 두려워하며, 음성이 시방에 가득 퍼지고, 삼악도의 고통이 멈추며, 다른 잡음이 섞여 들어오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되며, 용맹한 마음으로 정진하게 되고,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기뻐하시며, 항상 삼매가 현전하고, 반드시 정토에 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논(論) 가운데서 묻되 “무엇을 인하여 한 번 염불한 힘이 능히 모든 업장을 끊는다 하는가” 함에 답하기를 “마치 한 개의 전단향이 능히 사십유순의 이란림(伊蘭林)을 뒤덮는 것과 같다. 또 비유하면 어떤 이가 사자의 힘줄로 거문고의 줄을 만들어 쓰면 그것을 한 번 튕기는 소리에 나머지 줄은 모두 끊어지고 마는 것과 같으니, 만일 보리심 가운데서 염불삼매를 행한다면 온갖 번뇌업장이 단박에 단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부처님의 위신력이 가히 생각키 어려워 그 현통(玄通)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 마치 돌이 쇠를 흡수함과 같고 물을 강하(江河)에 쏟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자비선근의 힘이라야 능히 이와 같은 일을 볼 수 있나니,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는 참으로 신령스러운 감응이 환하게 밝을 것이다. <만선동귀집>

또한 옛적에 한 사람이 육조대사에게 묻기를 “염불에 무슨 이익이 있나이까?” 하고 묻는 말에 육조대사 답하기를 “일구(一句),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 만세의 괴로움을 뛰어나는 묘도(妙道)요, 불(佛)을 이루고 조사가 되는 정인(正因)이요, 삼계 인천(人天)의 안목이요,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지옥을 깨뜨리는 맹장이요, 많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이요, 오천대장(五千大藏)의 골수요, 팔만총지(八萬總持)의 중요한 길이요,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방방(良方)이요, 고해를 건너는 배요, 삼계를 뛰어넘는 지름길이요, 최존최상의 묘문이며 무량무변의 공덕이니라. 이 일구,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하여 염념(念念)이 항상 나타나고, 시시로 마음에 떠나지 아니하며, 일이 없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고,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안락할 때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병고가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살았을 때에도 이렇게 염불하고, 죽어서도 이렇게 염불하여, 이와 같이 일념이 분명하면 또 무엇을 다시 남에게 물어서 갈 길을 찾으랴. 이른바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극락 가리라” 하였다.<禪淨雙修集要>

이와 같은 염불의 위력에 근거하여 천태 지자대사는 사람의 근기와 원력에 따른 오방편염불문을 제시, 일체중생이 미타의 대원해(大願海)에 들기를 염원하였다.
첫째,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칭명왕생염불삼매문(稱名往生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둘째, 무시이래의 업장을 소멸하기 바라는 사람은 관상염불염불삼매문(觀相滅罪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셋째, 마음의 미혹을 여의기 바라는 사람은 제경유심염불삼매문(諸境唯心念佛三昧門)을 의지하여 닦아야 한다.
넷째, 세상의 욕망과 집착을 떠나기 원하는 사람은 심경구리염불삼매문(心境俱離念佛三昧門)을 닦아야 한다.
다섯째, 생사해탈과 열반을 바라는 사람은 성기원통염불삼매문(性起圓通念佛三昧門)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 정근(精勤)

시시각각으로 흩어져 산만하고 안정되지 못한 마음을 한 생각으로 집중시켜 정성껏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을 생각하고 찬탄하는 '정근'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지며, 무한히 맑고 밝아져 확고부동한 마음자리를 찾아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정근(精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쓴다는 뜻인데 보통 우리가 기도할 때에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① 석가모니불 정근
나무 영산 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천상천하 무여불 시방세계 역무비
세간 소유 아진견 일체무유 여불자 (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② 아미타불 정근
나무 서방정토 극락 극락세계 무량수 여래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본심미묘 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리 사바하) 세번
계수서방 안락찰
접인중생 대도사
아금발원 원앙생
유원자비 애섭수 고아 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③ 관세음보살 정근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옴 아로륵계 사바하) 세 번
구족신통력 광수시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④ 지장보살 정근
나무 남방 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지장보살 멸정업진언(옴 바라마리다니사바하) 세 번
지장대성 위신력 항하사겁 설란진
견문첨례 일념간 이익인천 무량사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⑤ 화엄성중 정근
나무 금강 회상 화엄성중…
화엄성중 혜감명 사주인사 일념처
애민중생 여적자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⑥ 칠원성군 정근
나무 북두대성 칠원성군…
영통광대 혜감명 주재 공중 영무방
나열벽천 임찰토
주천인세 수산장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⑦ 산왕대신 정근
나무만덕고승 성개한적 산왕대신…
영산석일여래촉 위진강산도중생
만일백운청장리
운거학가 임한정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⑧ 나반존자 정근
나무천태산상 독수선정 나반존자…
나반신통세소희 행장현화임시위
송암은적 경천겁
생계잠형입사유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⑨ 조왕대신 정근
나무팔만사천 조왕대신…
향적주중상출납 호지불법역최마
인간유원 내성축
제병소재 강복다 고아일심 귀명정례(반배)

<참회게>
원멸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죄업장 아금참회 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
<회향게>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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