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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이해
2012.12.25 18:14

진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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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세계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고 불교로서의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다. 법은 진리이다. 하지만 그 법은 불교에만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라는데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며 자신감이 넘쳐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실천 수행이 동반되었을 때 불자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기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겠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 법의 구조는 어떠한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아본다.

 

1. 법(法) - 열반으로 인도하는 진리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나이다. 이 법은 현실에서 밝혀진 것이며, 머지않아 과보(果報)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잡아함경>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진리의 내용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에 이미 설해져 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법보(法寶)라고 한다. 법은 곧 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법을 깨닫는다’, ‘법을 본다’는 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다. 이것은 깨달음, 즉 열반과 성불을 뜻하기 때문이다.


법의 언어인 ‘다르마(dharma)’는 산스크리트로, 기원을 찾자면 인도 고전인<베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시대에 법은 ‘자연계의 법칙’, ‘인간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용어였고, 팔리어 주석에 따르면 ‘인(因)’, ‘덕(德)’, ‘가르침’, ‘사물’의 네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다르마가 불교에서 ‘법의 내용을 이루는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말이 되어 ‘깨달음을 얻는 진리’ 또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법(敎法)’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불교에서 자주 쓰는 ‘’이라는 말은 바로 ‘진리’을 의미 한다.


그리고 이 법의 의미가 존재(存在), 물(物)이라는 의미로 확대되고,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제법(諸法), 연기(緣起)에 의해 성립한 존재를 말하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 법의 의미는 모든 현상과 그 현상을 성립시키고 있는 근본적 존재를 말한다. 이런 법의 개념은 불교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이러한 법(法)의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와 그것을 제자에게 가르치신 교법을 일컫는다. 삼보 중 법보를 비롯하여 일상적으로 법이라고 말할 때 이에 해당된다.
 

둘째,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사물을 일컫는다. 제법무아의 법, 연기에 의해 성립된 존재인 세상의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금경경>과 같은 대승 경전에서 ‘모든 법의 공한 모양[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고 말할 때가 이에 해당 된다.
 

셋째, 불교 경전 일컫는다.


이와 같이 법의 개념은 다양하며, 경전과 논서에 쓰일 때는 '진리와 교법'이라는 의미 외에 '존재'라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2. 연기(緣起) - 공존의 세계관

 

"비구들이여. 내가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은 모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서 그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모르고 있다. 언제 이 고통에서 헤어나는 도리를 알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그 때 다시 ’무슨 연유가 있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바른 사유와 지혜로써 해답을 얻었다. ’태어나기 때문에 늙고 죽음에 이른다.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고.." <잡아함경>


구도자 고타마가 진리, 즉 법을 깨달아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6년 간의 모진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든 지 7일째 되는 날 새벽별을 보고 깨달은 진리,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태어남이 있으므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생성과 소멸의 관계성’을 깨달은 것이다.

 

연기(緣起)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을 근거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차유고피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此生故彼生(차생고피생)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차무고피무)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차멸고피멸) <잡아함경>

 

연기법은 인연법(因緣法) 또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홀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섶에 붙은 불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은 존재의 소멸을 설명한다. 이처럼 연기법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진리를 밝혀준다.


이 연기법에 따르면, 고통과 슬픔은 홀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뜻이나 숙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게 마련이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홍수가 나는 원인은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나비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한 알의 겨자씨에 수미산이 포함된다고 했다. 하나의 티끌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고 했다. 그만큼 아무리 사소한 하나의 파동, 하나의 물결, 하나의 날개 짓 일지라도 그것이 우주의 움직임과 관련 된다는 연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사소한 원인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조건과 결합되어 카다란 결과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이며, 어떠한 법을 조건을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낸다. 십이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십이연기는 중생의 삶이 12가지로 윤회하는 과정이다. 12가지가 무엇인지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 12연기(緣起)라고 한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이 없으며,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불변의 진리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수행자 고타마가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부처가 되었으며, 그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준다.


연기법은 사실 세계의 현상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깨닫게 해준다.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연기법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공생하므로, 나만이 아닌 너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인간과 자연계의 공생 관계를 설명한다.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것은 각각 주인이요,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각각의 소중함은 여러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신뢰와 상호 존중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이론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깨우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3. 중도(中道) - 두 극단을 떠난 바른 길

 

"제자들아, 그대들은 두 극단으로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면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을 돕느니라." <잡아함경>


중도는 쉽게 말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유(有)와 무(無)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고(苦)와 낙(樂)의 양쪽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가르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수행자 시절에 함께 수행하다 떠난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가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중도 사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중도와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친 연기법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 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는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통 사상가와 육사외도를 비롯한 신흥 사상가들은 크게 상주론(常住論)과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고정불변의 개별 아(我)인 아트만의 끊임없는 윤회를 인정하는 부류는 상주론을 주장하고, 윤회를 부정하고 한번의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류는 단멸론을 주장 했다.


상주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은 엄격한 고행을 통해서만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만과 아트만이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고행주의를 강조한 반면, 모든 것은 단 한번의 생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은 인과를 부정하고 현실에서 쾌락을 즐겼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왕위가 보장된 왕궁을 떠나 6년 동안 고행주의 수행을 택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의 수행법이 결코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수행을 중단하였다.


그러자 다시 함께 수행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 며 부처님을 비난하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고행주의에 빠져 있던 그 다섯 비구에게 양 극단을 벗어난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키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즉 중도사성제설법을 듣는 대상의 근기에 맞게 연기법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중도의 중요한 가치가 숨어 있다.


‘연기는 곧 중도다’라는 말이 있다. 중도란 양 극단을 떠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요, 조화로운 관계는 바로 나와 너를 고집하지 않고 상호 연결되는 연기 관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입각해야만 중도의 자리에 서게 된다. 사성제 또한 인과의 법칙, 즉 연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도, 연기, 사성제는 입장에 따른 차이일 뿐 그 근본 구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도의 가르침을 구분하여 ‘고락중도(苦樂中道)’, ‘단상중도(斷常中道)’, 유무중도(有無中道)‘라고 한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극단, 단멸론과 상주론이라는 극단, 유 아니면 무라는 극단을 떠난 길이 바로 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세 가지는 부처님 당시에 횡행하던 극단적 사상과 사조를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중도를 실천할 것인가? 중도를 양 극단의 가운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일 뿐 중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흑백논리가 틀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회색논리를 펴는 것은 옳지 않다.

 

중도는 잘못된 것을 떠나 옳은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중도는 곧 정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중도는 나와 너, 옳음과 그름, 이것과 저것, 내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고통을 치유하는 바른 길이다. 즉 중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이 바로 팔정도이며, 이 팔정도는 사성제와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은 내세나 영혼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이를 무기라고 한다. 어느 질문에 대답하면 삿된 소견이나 의혹만 더해질 뿐이며, 연기와 중도의 자리에서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화살의 비유 들어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얽매기보다 올바른 생활과 수행, 즉 중도의 실천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으라고 권하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독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독의 성분과 화살이 날아온 방향 등을 알아야 한다며 독화살 빼는 것을 늦추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삶도 마찬가지다 팔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천함으로써 하루 빨리 깨달음에 다다라야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도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견해나 극단의 견해를 떠난 바른 견해와 실천을 제시하여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성철스님의 말씀처럼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로서,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바이다.  

 

4. 삼법인(三法印)  - 존재의 참모습

 

부처님은 흙을 조금 손톱 위에 얹어 놓고 그 비구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겨우 이 정도의 물질이라 해도,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구여, 만약 손톱 위에 얹어 놓은 이 정도의 물질에서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르치는 청정의 행으로 고(苦)를 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여, 겨우 이정도의 불질이라도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가르침인 청정행을 따른다면 충분히 고를 멸(滅)할 수 있으리라.” <증일아함경>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법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 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나 똑같이 찍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인 셈이다.
 

삼법인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 모든 변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 그리고 거기에다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를 넣거나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 가지를 다 넣어 사법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째, 제행무상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한때 ‘인생무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적이 있는데, 그 때의 무상은 ‘허무하다’는 뜻으로 제행무상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의 속성이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모든 적이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년만년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생각한다. 권세와 명예, 재산도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권력가나 재벌가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겸허하게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사려보면 지금까지 자신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잘못된 생각이 바로전도몽상 이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된다.

 

둘째, 제법무아모든 변하는 것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무아가 되어 나를 텅 비우고 아집과 소유욕을 버리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의 화합과 평화가 앞당겨 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세상사는 희로애락이 다 있어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 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아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므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 중심의 습성에 길들어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을 어떻게든 지속시키려고 애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영웅호걸에서부터 미천한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항상 풍족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을 간파하시고,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설파하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은 평안을 구할 수 있다. 마지막 열반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깨쳐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대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5.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첫 설법의 내용이기도하다. 사성제는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처님께서 연기법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진리,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사성제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서 고. 집. 멸. 도 사성제라고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설명하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속에 있다. 인간에게는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멸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 열반의 경지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멸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은 여덟가지가 있으니 바로 도성제팔정도가 그것이다.

 

팔정도여덟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1) 정견 :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여실지견이라고 부른다. 사물을 바로 보는 것 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바른 가치관이 확립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2) 정사유 : 바른 생각이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3) 정어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질 하는 말 욕이나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뜰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낸다. 항상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을 해야 한다. 
 

4) 정업 : 바른 행동이다. 모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5) 정명 : 바른 생활이다, 즉 바른 직업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 즉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정정진 :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쉼없는 노력을 말한다. 아울러 옳은 일에 대해서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7) 정념 : 바른 마음 챙김이요, 바른 마음 집중이다. 마음의 움직임과 느낌에 대해서 마음을 챙겨 바로 깨어있는 것이다. 
 

8) 정정 : 바른 선정이다. 마음 챙김과 마음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바른 삼매의 상태에 들어가 고요한 평정에 머무는 것이다. 정정의 상태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팔정도도성제의 내용이다. 괴로움과 집착의 상태를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팔정도의 첫째 방법이 ‘올바르게 보는 것’ 이라는 점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의이치를 올바로 보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도 올바른 행동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견해로 바라 보면 극단적인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모든 행동이 좌우된다. 즉 정견이 없으면 팔정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정견은 팔정도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면 정견의 구체적인 내용을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만물이 모두 서로 의지 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과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잇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지견‘,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버리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정견을 성립된다. 즉 연기의 관점에서 볼 때만이 잘 못된 양 극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적 시각으로 삶과 세상을 보는, 올바른 가치관이 정견이다.


불자들은 중도적 사고와 실천을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중도의 가르침은 부처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지정한 불자라면 중도, 즉 정도를 걷는 사유와 실천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생활에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정견, 즉 연기적 관점을 갖는 것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자들 스스로 갖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잊지 않고 잘 익혀 생활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6. 업과 인과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 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六師外道)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을 비판하고, 이들의 가르침이 가져올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허공도 아니요 바다도 아니다.

깊은 산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도,

일찍이 내가지은 악업의 재앙은

이 세상 어디서도 피할 곳 없나니 <법구경>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 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고통스러운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인과응보라고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의 까르마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기 운명를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 출신계급이나 삶의 조건조차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따른 가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그 죄 값을 받지 않는다고 언짢아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움 과보를 낳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혹-업-고의 삼도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는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 한다. 업이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 가지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삼업의 과보는 매우 정확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 율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그 삶은 구속받고 고통스러워 진다.


반면 선업을 쌓을수록 삶은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벗어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7. 공(空)과 마음 

 

무아와 무상은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공으로 개념이 확대된다. 이란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허공은 줄거나 줄지 않으며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텅빈 공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허공과 같은 마음이 바로 공이다.


우리가 법회 때 암송하는 <반야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공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근본 불교시대를 지나 부파불교시대에는 나는 무아로서 공하지만, 그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법은 실체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승 불교에 접어들어 불교도들은 반야의 초월적 지혜를 높이 내걸고 법도 역시 공하다고 천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반야심경>을 보면 ‘조견오온개공’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를 구성하는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혜의 눈으로 비추어 보니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모든 것이 공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어떤 요서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모드 일지라도 , 언젠가는 소멸하고 만다. 모든 본체들은 쪼개고 쪼개 보면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자체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으며 뭐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의 공은 이러한 사물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쪼개어 공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사물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그 모습이 비어있음을 투시하는 길을 제시한다, 어떤 사건이나 물건,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더라도 바로 그 본래 모습이 공함을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또 하나 대승불교의 공은 모든 지적인 분별을 타파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모든 분별작용으로 인한 견해와 판단은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므로, 그러한 이성적인 생각. 판단. 입장. 주장 등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공의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편견이나 앎의 조그마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양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편을 가르며 싸운다. 공은 그러한 억측과 편견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어느 입장에 서서 집착하는 그 마음을 모조리 타파해 버린다.


그래서 색, 즉 물질이란 것도 실체가 없으니 공이라 부정하고, 모든 판단과 분별작용도 공이라고 부정한다. 나아가 공마저도 부정하여 그 공에 집착하는 것도 철저히 부정한다. 고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것을 허무주의적 견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가? 그것이 아니다. 공마저 공으로 비워 다시 색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견해를 베어버리는 절대 부정을 거쳐 절대 긍정에 도달 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색은 공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공으로서의 부정을 통해서 살아난 묘유로서의 색이다. 이러한 묘유로서의 색은 도처에 있다. 머무는 곳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색은 공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고 쓸모가 없는 무가 아니라, 형태를 갖춘 색으로 존재한다. 공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그 색의 움직임 속에 공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묘유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슬이나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색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즉 색과 공, 둘 다에 집착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자세로서, 묘유의 움직임을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를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중심 수행으로 내거는 선은 이 묘유의 움직임을 바로 이 자리에서 보게 하는 수행법이다. 진공묘유로서의 나를 바로 이 자리에서 찾는 것이 선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고 해서 일체유심조라 한다. 그 마음이 바로 공의 마음이다. 그 공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유일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마음이 창조주요 주인공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면 그리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마음먹기에 다려 있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노력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감응하고 느낄 때 제대로 보이며 널리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공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심 하면서 자기를 허공처럼 열어 보라. 그렇게 자기를 비우면 그 빈 마음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자기를 비우고 자비와 사랑,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 실천하는 만큼 나는 넓어지고 전 우주와 하나가 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은 이러한 마음을 바탕에 두고 나를 한 없이 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며,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다.

 

8. 계율 - 불자의 생활 규범  

 

계는 산스크리트 실라엣, 율은 비나야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계와 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율은 일반적으로 승가를 구성하는 사부대중이 준수해야 하는 삶의 방식과 규율로서 함께 통칭된다.


그러나 계와 율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는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적 수행이며, 은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타율적인 행위 규범이다.

따라서 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고, 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의 조항을 위반했을 때에는 규제나 벌칙이 가해지지만, 계에는 그 같은 벌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는 어디까지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법에 근거를 둔 생활방식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라고 한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늘어나면서 수행자 개개인의 자각만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는 출가자로서 훈련이 덜 된 사람이나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수행자로서 허용 될 수 없는 행위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런 옳지 않는 행위가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규제하는 금지조항을 만드셨다. 이것을 수범수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율은 일정한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를 예측하고 일시에 율장으로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그때 그때 제정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로서 개인적으로나 교단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위 규범을 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율은 경전 결집 과정에서 계속 전승되어 왔고, 출가자와 재가자의 규범으로서 계속 지켜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이 자자포살이다.  

 

믿음 있으면 계 절로 이뤄지고

계를 따르면 이름이 높아진다.

이름을 좇아 어진 벗 많으리니

가는 곳 어디서나 공양 받는다. <법구경>  

 

그런데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율보다 오히려 를 더 중요하게여기는 풍조가 생겨났다. 즉 율의 조항을 중시하면서도 더자각적이고 적극적인 계의 관점에서 율을 새로이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대승불교가 가진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자세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계율 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종 불교의 특색으로 청규를 들 수 있다. 청규청정한 규칙이라는 뜻으로 , 대중생활의 규율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당나라 백장 회해 선사가 제정하고 시행한 ‘백장청규’가 대표적이다. 백장 회해 선사가 총림에서시행해야 할 규칙을 제정하였고, 그뒤 각 사찰에서 자기 절에서 시행할 규칙을 마련하여 이를 청규라 하였다.


청규에는일반적인 계율과 어긋나는 조항이 있다. 출가자의 생산행위를 금하고 잇는 계율과 반대로, 백장 청규에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여 ‘하루 일하지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와같이청규에 계율과 어긋나는조항이있는 것은 노동을 통한 수행이라는 선종의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규의 정신에도 계율을 존중하면서대중생활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기본 원칙이 살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가불자가 수지해야 하는 오계,십선계, 보살계 등은 모두 이와 같은 계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자율적인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의 각 조항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구해석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오계를 지키는 것은 불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계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것을 먹지 말라.  

 

오계는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를 테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의 경우, 모든 생명은 본래 불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므로 죽이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오계의 목적은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청정한 계를 지킴으로써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불자는 오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즉 일상의 삶 구석구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더불어 사는 이 세상을 청정정토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살생을 금하는 것이 가장 큰 계율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살생을 막기 위해 그것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지범개차(持犯開遮) 또는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한다. 지는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고 범은 못 지킨다는 뜻인데,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선 이를 허용하는 것을 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를 어기고 사냥꾼에게서 사슴을 구해준 나무꾼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원칙대로 다시 막아야 하는데, 그것을 차라 한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제약이 되거나. 또는 그 계를 지키기 위해 더 큰 계를 어겨야 하는 경우, 그 상황를 타개할 때까지 열고 상황이 다라지면 다시 닫을 수 있어야 한다.


계율은 또한 자기 스스로 그것에 얽매게 된다면, 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계는 수행자의 심신이 더 이상 오욕 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두려움 없는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동반자여야 한다. 계를 지키는 것은 성실하고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발원이므로,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것이 중도에 입각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다.


계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규범을 세우기 위해 지키는 것이다. 계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를 수지한 뒤에는 계율을 삶의 좌표이자, 가치관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참되게 하는 길잡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이러한 계를 지키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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