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과 수행

불자의 신행과 실천

by 무구 김정희 posted Dec 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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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의 신행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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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과응보
 

업(業)

업(業)이라는 말은 불교인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말이다. 특히 예로부터 윤리적인 규범들과 결부하여 좋은 일은 권장하고 나쁜 일은 못하게 막는 근거로서 업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여 왔다. 또한 복을 짓는다는 말이 좋은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반대로 업을 짓는다는 말은 나쁜 행동을 한다, 즉 죄를 짓는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다른 종교에서 현세에서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에 따라 자신의 내세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업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업 사상은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부터 인도의 여러 사상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를 번역한 말로 ‘무엇을 짓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업이란 본래 행동 혹은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선과 악에 대한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든 간에 그 행위가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업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따르고 한 가지 행동이 다른 행동을 일으키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것에 의해 일어난 결과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떤 행위의 원인이 되는 행위가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로서 복을 받거나 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 행위를 업이라 부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과보(果報) 또는 업보(業報)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은 업은 몸으로 짓는 업[신업(身業) ], 입으로 짓는 업[구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업[의업(意業)]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이를 삼업(三業)이라 한다.


몸으로 짓는 업은 육신의 움직임으로, 그리고 입으로 짓는 업은 말에 의해 짓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업이란 정신적 활동, 즉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마음으로 짓는 업인데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 다른 것에 직접 영향을 미치든 아니면 그저 마음 속에만 품고 있든 간에 모두 마음으로 짓는 업에 속한다.


또한 공업(共業)이란 말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행위를 하고 그 과보도 함께 받는 것을 말한다.

한편 『천수경』의 「참회게」에서는 우리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악업은 탐욕[貪], 증오[嗔], 어리석음[癡] 등의 삼독(三毒)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십악참회게」에서는 열 가지 종류의 악업과 그에 대한 참회를 나열하고 있다.

 

◎ 십악참회(十惡懺悔)
살생중죄 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 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 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 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 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 금일참회(兩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 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 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 금일참회(瞋等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 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참회게(懺悔偈)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윤회

 

윤회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를 포함한 여섯 개의 세계[육도(六道)],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끝없이 죽고 태어나면서 돌고 도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세 가지의 세계[삼계(三界)], 즉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나누어진 선정의 단계를 말한다.

첫 번째 육도 윤회는 현생에서 우리가 짓는 업에 따라 내생의 세계가 정해지는 것으로 선업을 쌓고 바른 수행을 통해 다음에 보다 나은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악업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운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이야말로 윤회의 원동력인 것이다.

 

한편 어떤 종교에서는 천상의 세계에는 신과 같은 존재들이 머무는 곳으로 내생에 그 곳에 태어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불교는 천상의 세계도 윤회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천상이나 극락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째의 삼계 윤회는 육도를 다시 세 가지의 세계로 분류한 것인데,

 

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서른 세 개의 천상세계 중 일부로 물건과 잠을 탐하고, 음란한 생각이 가득한 우리 중생의 일상적 의식 상태를 말한다.

 

색계는 욕계에 속하는 천상의 세계보다 위에 있는 일부의 세계를 말하고 선정에 의해 욕망은 제거되었지만 육신과 같은 물질이 아직 남아 있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무색계는 삼십삼천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네 개의 천상 세계에 해당되며 이 단계는 육신의 굴레마저도 완전히 뛰어 넘은 자유자재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수행에 따라 더 높은 세계로 갈 수도 있고 번뇌와 망상에 의해 낮은 단계의 세계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불교의 윤회설을 공부할 때 반드시 염두해야 할 가르침으로 무기설(無記說)이 있다. 무기설이란 부처님께서 존재의 본질에 관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그 답을 대신하신 것을 말한다.

 

그 네 가지 질문이란 첫째, 세계는 시간적으로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둘째, 세계는 공간적으로 보아 무한한가, 유한한가? 일부는 무한이면서도 다른 일부는 유한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셋째,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일부는 같으면서도 다른 일부는 다른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넷째, 여래는 죽은 후에 존속하는가, 존속하지 않는가, 일부는 존속하고 다른 일부는 존속하지 않는 것인가, 알 수 없는 것인가 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들 자체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부처님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들어 직접적인 답을 피하셨던 것이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님이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말룽캬라는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 것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보통 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의 털로 되었는지 독수리 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노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룽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했다.
『중아함경』 「전유경」

 

실제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 과학도 결정적인 답을 줄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교는 죽은 후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는 우리 마음의 세계를 보다 더 바르게 알고 깨닫는 데 초점을 맞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것들과 정신적인 것들은 매순간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처님은 이러한 것을 무상이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과 몸도 삶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의 바퀴를 돌고 있다고 하겠다.

 

인과


앞에서 윤회는 업을 그 원동력으로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업은 원인과 결과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는 업과 윤회를 설명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나아가서 원인과 결과 즉 인과(因果)는 업과 윤회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알 수 있는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서로 의지하여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기에 그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곧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실상을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 사물을 보고 그것이 책상인지 의자인지 아는 것을 분별(分別)이라고 할 때 분별작용에는 반드시 분별하는 주체와 분별되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 결과가 우리의 분별인 것이다. 즉 똑같은 강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보이고, 지옥의 죄인들에게는 불의 강으로, 그리고 아귀들에게는 피, 고름, 오물이 가득한 강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비록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들에게는 각자의 근기에 연(緣)하여 서로 다른 분별 작용이 일어난다(起).

따라서 불교는 연기법으로 존재의 실상을 바라보기에 우리가 분별하는 모든 존재는 허망하고 무상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일상생활의 마음가짐으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는 이치를 일깨워 주어 아집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는 가르침이다.

한편 흔히 우리는 우리가 지은 선업과 악업의 과보는 과연 언제 받는가 하는 의문을 한 번씩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나쁜 일을 하고도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데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원인이 발생하고 과보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에 대해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손바닥을 치는 그 즉시 소리가 나듯이 원인이 발생한 다음 순간 곧바로 결과가 일어나는 경우이다.

 

둘째는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그에 대한 결과가 일어나는 것으로 꾸준히 공부한 결과 시험에 합격한다든지 직장 내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꾸준히 다한 결과 승진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는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결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 혹은 우리가 참선 수행을 할 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경우가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전생의 무명(無明)과 그에 의한 모든 업에 의해 현생이 일어나고 또 현생의 행위에 의해 다시 내생이 결정된다는 육도 윤회를 말하는 것으로 현생의 업이 다음 생의 결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는 것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이 간단한 진리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접근방식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것은 인과 관계 속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무상한 것이고 그 관계를 떠나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이 지어낸 관념일 뿐이기에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이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불자의 올바른 생활
 

보시(布施)


보시(布施)는 재가 신도들이 절의 불사를 위해 자신의 돈이나 물품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절의 불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것을 어떤 조건이나 바람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시법에는 보시의 종류에 따라 부처님의 법을 원하는 자에게 부처님의 법을 설하는 것[法布施],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주는 것[財布施], 그리고 공포에 휩싸여 있는 중생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는 것[無畏施]으로 나뉜다. 또한 그 과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보시라는 선업을 통해 내생에 그 복덕을 누리는 것과 번뇌를 완전히 끊고 윤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있다.

한편 보시는 대승불교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 중 첫 번째 덕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내생에 복덕을 누리는 보시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의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주고서도 주었다는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서 스스로가 보시를 했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인과의 법칙에 의하여 반드시 그 보시 행위의 과보로써 내생에 그에 상당하는 복덕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그 보시가 너무나도 커 내생에 천상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그 복덕이 다 하면 또 다시 윤회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더구나 만일 우리가 보시를 할 때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낀다면 그것이 반드시 선업을 짓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시는 자신의 마음공부가 얼마만큼 되었는가를 가늠해 보는 좋은 척도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테니스 선수가 완벽한 서브를 넣기 위해 매일같이 연습을 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조건 없이, 그리고 바람 없이 주는 완전한 보시를 하기 위해 꾸준히 보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계율(戒律)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책들을 삼장(三臧), 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이라 한다. 이 중에서 율장은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란 부처님께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게 유지하여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면 재가 불자의 경우 기본 교육을 받은 후에 삼귀의계와 오계를 받게 되는데, 이 계율만 잘 지켜도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준다고 한다.

이러한 계율에는 출가 스님을 위한 구족계(具足戒 : 비구▷250계, 비구니▷348계)와 재가 불자를 위한 5계(五戒), 즉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등이 있다.

여기서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계율들은 어기는 그 자체가 악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계는 술 마시는 행위 그 자체는 나쁜 일이라 할 수는 없으나 과음을 하거나 중독이 되면 자신의 몸을 해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으므로 지켜야 한다.

또한 매달 음력 8, 14, 15, 23, 29, 30일의 6일을 6재일(六齋日)이라 하는데 이 날은 사천왕이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선과 악을 감찰하는 날이고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악귀가 잘 붙는 날이다.


이러한 날에는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다음의 팔관재계(八關齋戒)를 지켜야 한다.

 

첫째, 살생하지 말라.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
셋째, 음행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음주하지 말라.
여섯째, 몸에 패물을 달거나 화장하지 말며 노래하고 춤추지 말라.
일곱째,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여덟째, 제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

 

팔관재계는 위의 재가 불자가 지켜야 할 오계에 몸치장을 화려하게 하거나 화장을 진하게 하여 밖에 놀러 다니지 말 것, 높고 넓고 잘 꾸며 놓은 곳에 앉지 말 것, 그리고 오전에 한 끼만 먹을 것 등이다.


나아가서 재가 불자가 지켜야 할 계에는 십선계(十善戒)가 있는데, 이것은 오계와 달리 수계 의식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앞에서 스스로 참회와 맹세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계이다. 이는 『천수경』 십악참회의 열 가지 악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한다.

 

참회(懺悔)


우리는 생활속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게 된다. 이러한 죄악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정화하지 않는다면 불자의 삶은 결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이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만약 당장에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삼독은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 스님은 참회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上懺悔)이니라. 참(懺)이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무엇인가? 회란 이후에 짓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모든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 하는 것이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죄가 잇달아 일어나니 이러고야 어찌 참회라고 할 수 있으랴? 『육조단경』 「참회」

 

이처럼 참회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삼독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삼독을 없애나가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탐.진.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면 된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되,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고 가정하고, 한 번의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이다.

우선 탐욕과 관련된 상념들을 한 가지씩 떠올려서 충분히 확인하고 스스로의 성품에 되뇌인다. “이러이러한 욕심을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하고 마음 속으로 다짐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욕심들을 참회해 나가되,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로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서 진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다보면 보다 근원적인 욕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어쨌든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 나간다.

 

다음은 성냄에 관해서 참회한다.


“이러이러하게 화를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하고 반성해 나간다. 시기질투하고 남을 흉보는 것도 일종의 성냄이다. 역시 참회해야 한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무조건적인 참회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건부 참회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다. 원인이야 어쨌든 간에 자신의 성품 가운데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는 것은 무언가 자취를 남긴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것을 확인하여 없애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건부 참회는 다만 자신의 그릇에서 맴도는 것이므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에 관해서 참회한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한껏 못났다고 생각해야 참회가 된다. 우리의 본성이야 잘나고 못나고를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다만 분별의식이 못났다는 것이다. 꾀죄죄한 나를 잘났다고 착각하여 남과 비교해 잘잘못을 따지는 것, 이것이 정말 못난 것이다. 또한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베푼 만큼 돌아오고, 지은 만큼 받는 것이다. 이를 확신하지 않는 까닭에, 은덕은 조금 베풀고서 대가를 많이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허물은 많이 짓고서 과보는 조금 받으려 전전긍긍한다.


이처럼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기에, 자신을 흠뻑 사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흠뻑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모든 존재를 한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를 통해 얻어지는 귀중한 결실이다.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를 사랑하려 한다면 인생을 낭비하고 말뿐이다. 이렇게 해서 참다운 자기 사랑에 점차 눈이 떠가면, 남의 허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스스로에게 못마땅한 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못마땅함을 잘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자주 눈에 띄면, 얼른 내 마음을 바로 잡을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08감사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108배를 하거나, 108염주를 돌리면서 낱낱이 감사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위에서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인 사항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을 때까지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이와 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굉장한 자기긍정을 가져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발원(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다.

 

둘째로,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면,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에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하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하다. 발원이란 ‘탐.진.치’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이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탐.진.치의 대전환이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심(大信心)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大憤心)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大疑心)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돌은 그저 돌일 뿐이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된다.

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려扁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이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성취[上求菩提]와 중생구제[下化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보살이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에 모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완성해야 한다.

 

따라서 그 때뿐인 결심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이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리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僧那僧涅, 大誓莊嚴]’고 표현한다.

 

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 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한다.

 

밖의 중생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 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지이다’ 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마음이 편안하여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특별한 바람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좋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합니다.’

 

3. 기도

 

1) 기도


보통 때에는 전혀 종교적 성향이 없던 사람이라도 위기에 처하거나 심각한 상황에 부딪히면 종교에 의지하곤 하는 일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면 무언가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그것을 이겨내고자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크다.

즉 불교의 기도는 불ㆍ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에 지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그 기도발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ㆍ보살님의 공덕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기도는 선지식과의 만남을 통한 자기와 이웃과의 만남을 뜻한다.

따라서 기도의 마음가짐은 우선적으로 간절한 마음이 앞서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적을수록 기도는 오히려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심지어 잘 되고 못 되고 까지도 부처님께 맡겨버릴 수 있다면, 이미 성취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정합이 되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적멸보궁이나 유명한 기도도량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게 해준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의미로 보아야 한다.

부처님이 왜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고 싶겠는가? 수백 가지, 수만 가지 모든 중생의 소원을 모조리 들어주고 성취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심이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하는 것은, 정합이 되는 소원, 즉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과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한 그 소원성취는 요원한 것이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수다라니나 능엄주 혹은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광명진언 등을 지송하는 것을 주력(呪力)이라고 한다.

 

『금강경』이나 『지장경』, 혹은 『화엄경』, 『법화경』, 『원각경』 등 경전을 읽고 지송하는 것을 간경(看經) 혹은 독경(讀經)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과 같이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속해서 염하는 것을 염불(念佛) 혹은 정근(精勤)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백팔배, 삼천배 등과 같이 절을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기도는 가능한 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령’으로 해나가는 것이 좋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성취를 보기가 어렵다.

 

또 한꺼번에 여러 시간을 했다고 며칠은 쉬고 해서는 곤란하다. 규칙적인 식사습관을 지닌 사람은 식사시간이 가까워지면 몸속에서 먼저 알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기도도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령으로’ 하다보면 몸과 마음에 분위기 조성이 잘 되어져 기도삼매를 쉽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법당을 정하여 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의 요령도 한 가지를 정해 놓고 일정 기간 동안은 같은 요령으로 지속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매일 천수다라니 108독 이상을 한다거나, 금강경을 7독 이상 한다거나 염불을 삼천 번 이상 한다거나 하는 등이 그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절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이 봉행하면 된다.

어쨌든 외부를 향한 기도가 점차적으로 내부지향적으로 바뀌어져 가고, 궁극적으로는 ‘일념에서 무념으로’ 진전되어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기도를 하는 데도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하다. 즉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선택해서 앉으면 된다. 옷차림도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이다. 기도할 때에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른 호흡이 중요한 것은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기도를 하다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다.

기도할 때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하다. 즉 이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요,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할 때 기도는 참다운 공덕을 쌓게 된다. 기도할 때 독송하는 경전은 기도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르다.

먼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경전을 통해서 불ㆍ보살님의 서원과 나의 정성이 하나가 되게 하는 데 있다. 기도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ㆍ보살님께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 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넷째는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ㆍ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염송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2) 기도의 종류

 

관음기도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가장 뿌리 깊이 내린 것이 관음신앙이다. 이 관음신앙과 연관된 경전은 『반야심경』, 『천수경』, 『법화경』 등이다. 이 경전은 다른 경전보다 세상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구입하기가 쉽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떼스바라를 뜻으로 옮긴 말이다. 관자재, 관세음, 관음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관찰한다는 뜻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일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청하면 32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타내어 구원해 주신다.


관음보살상은 어머니같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후덕한 모습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의 명호를 부르거나 찬탄, 공양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 잘리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시달리지 않고 쇠고랑을 차지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고 … 아들을 원하면 아들을 낳고, 딸을 원하면 어여쁜 딸을 낳을 것이다. 법화경』보문품」

 

지장기도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성행하였다. 지장보살님은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도리천에서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고 무불세계(無佛世界)의 육도중생을 교화하는 대비(大悲)보살이다. 지장보살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있으며 특히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신 분이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대비원력의 보살이시다. 이 보살님은 항상 지옥에 계시면서 오늘도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한다.

 

풍년이 들며, 집안이 편안하고, 죽은 조상이 천상에 태어나고, 부모가 장수하며, 원하는 것을 얻으며, 수재나 화재가 없고,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없으며, 나쁜 꿈이 없고, 출입 시 신장이 보호하며, 훌륭한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지장보살본원경』 지장 신앙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봉행되고 있다. 이 신앙이 널리 신봉되는 것은 『지장보살본원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가 장수하고’, ‘조상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효사상의 영향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선망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제반 천도의식을 봉행할 때 지장기도를 많이 봉행하고 있다.

 

약사기도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고, 늙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픈 몸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처방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만 가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먼저 다스릴 것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병의 근원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모습과 인종, 그리고 문화가 각기 다르듯이 욕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프고 병든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와 같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 정진하는 것을 약사기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약사전이 있는 사찰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이런 사찰은 아픈 사람이 기도 정진하여 치병의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나 설화가 많다.

약사여래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이다. 약사여래가 계시는 세계의 이름이 동방에 있는 정유리세계이므로 동방정유리계의 교주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약사여래신앙의 모체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는 약사여래의 12가지 서원이 나온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서원이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이다.


그 다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하고 12가지 ‘원을 성취시켜 주는 신령스런 주문’을 들고 있다. 이러한 약사여래의 가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약사여래 기도이며, 5세기 무렵 중국 수나라 시대부터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성기도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천과 하늘을 숭배했다. 즉 칠성은 하늘, 산신은 대지, 용왕은 물의 상징이자 그 세계의 지배자를 뜻한다. 불교가 전래되자 산신과 칠성은 자연스럽게 사원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불교와 융합하여 계승되었다. 이것이 후대에는 도교나 민속신앙과 합쳐져 칠성이나 산신, 용왕에 대한 예경으로까지 이어졌다.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신과 칠성에 대한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특히 자손창성, 부귀영화, 수명장수를 기원할 때는 일반적으로 칠성기도를 올린다. 이것은 태양을 숭배하며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던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칠성신앙은 바로 재래의 토착신앙과 불교가 엮어낸 문화이다.

 

참회기도


참회기도는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부처님께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즉 참회기도에는 이참(理懺)기도와 사참(事懺)기도가 있다. 이참기도는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며,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관찰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아서 모든 죄의 모습도 공적함을 보는 것을 말한다. 사참기도는 몸으로는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입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며,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는 기도이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 에 ‘지난 날 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 이래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등의 예가 있고, 또 『천수경』에는 ‘죄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 따라 생길 뿐, 마음이 멸할 때 죄도 없어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없어져 모두 공하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 한다…’고 하였으며 신라 때의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문』을 지어 참회의 본 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서산대사도 『선가귀감』에서 참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 따라 없어질 것이다. 즉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선가귀감』

 

3) 간경(看經)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경전은 부처님 열반 이후 정법을 전하는 보고(寶庫)로 여겨졌고, 따라서 경전을 신행의 지침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 있다. 『법화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써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또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는 까닭이니라. 『법화경』

 

경전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경구라 하겠다. 이와 같이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옛날에는 한 권의 경전이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경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간경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한다. 경전은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다. 따라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다. 원래 경전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던 것이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기도 하고 또는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간경은 뒤에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게 되었다. 풍경(諷經), 독경(讀經), 독송(讀誦)이라 하기도 한다.


이들의 의미를 구별해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흔히 구별 없이 하나의 뜻으로 쓰고 있다. 또한 독경ㆍ예배등을 부지런히 한다고 하여 근행(勤行)이라고도 한다. 옛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슬러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경전을 읽을 때에는 마음 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한다. 이때는 염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이다.

 

4) 염불(念佛)


불교는 중생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像)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염불이 있다.


『아함경』에서는 세 가지, 여섯 가지, 열 가지로 염불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 즉 염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번뇌가 사라져 하늘에 태어나거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한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길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念佛往生]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염불은 중국에 와서 그 방법과 내용이 더욱 발전하였다.


모든 부처님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통(通)염불’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에 떠올리는 ‘별(別)염불’로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구분보다 어떤 형태로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하는 일이 일반인들이 실행하기가 쉬우므로 나중에는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을 염불이라 했던 것이다.

 

염불은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대중의 호응이 높았다. 어려운 교리를 선호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반대중이 선호했다.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이 무애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이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외도, 마군, 잡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이다.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5)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ㆍ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 불ㆍ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된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한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실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한다. 정근하는 방법은 이렇다.

 

석가모니불정근
나무 불타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달마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승가부중 광림법회(절)
시작 - 나무 영산불멸 학수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반배)
(또는 나무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고픈 시간만큼 계속 반복)
마침 -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반배)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고 시방세계 둘러봐도 비길 자가 전혀 없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살피어도 부처님 같으신 분 천지간에 전혀 없네. 제가 이제 일심으로 귀의합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관세음보살정근
나무 원통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원통회상 불보살(절)
시작 -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반배)
(사바세계 두루하사 크고 깊은 원력으로 자비심을 펼치시어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세음보살---(하고픈 시간만큼 계속 반복)
마침 -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관세음보살이 업장을 멸해 주시는 진언) 옴 아로륵계 사바하 (3번)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신통한 힘 갖추시고 지혜 방편 널리 닦아 시방의 모든 세상 두루 그 모습 나타내시는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아미타불정근
극락도사 아미타불(절)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절)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절)
시작 - 나무 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나무아미타불(반배)
(서방 대교주 무량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하고픈 시간만큼 계속 반복)
마침 -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 (아미타 부처님의 미묘하신 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3번)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서방정토 안락국에 중생을 인도하는 아미타 부처님께 머리숙여 원하오니 왕생토록 하옵소서. 일심으로 바라오니 자비로써 거두소서.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지장보살정근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절)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살(절)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절)
시작 -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반배)
(중생고통 건지시는 원력의 으뜸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장보살---(하고픈 만큼 계속 반복)
마침 - 지장보살 멸정업진언
(지장보살이 업장을 멸해 주시는 진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 (3번)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지장보살 위신력은 말로 하기 어려웁고 잠깐 사이 보고 듣고 한순간만 생각해도 그 복덕은 무량하니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4. 참선


불교의 수행법 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린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참선은 앞서 공부해 온 참회나 발원 그리고 기도 등과는 차이점이 있다.


앞의 것들이 다분히 외부 지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참선은 철저히 내부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밖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 데 참선의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가장 불교다운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의거해 보건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만 법문을 듣고 각자 나무 밑이나 한가한 곳에 가서 사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외부의 어떠한 신과 같은 대상을 향하여 복을 빌거나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바라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스스로의 지혜를 돌이키도록 하고, 자비심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가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참선은 가장 불교적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참회나 발원 혹은 기도 등도 결국은 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 내지는 적응단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참회를 통해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변화가 시작되었고, 기도를 통하여 강력한 변화를 체험하였다면, 이제 그 마음자리 자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비파사나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 보는 묵조선(默照禪) 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조계종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참선은 불교의 여러 수행법이 중국에 전해져 현재의 형태로 정리된 것이다. 이러한 참선수행법 이전의 여러 가지 수행법을 관법수행이라고 한다. 참선에 대해 정리하기에 앞서 먼저 이 관법수행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관법수행 - 참선 이전의 수행법

 

수식관(數息觀)


고요히 사유하다 보면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한다. 어느 때는 찰나지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때문에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가 없다. 정말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날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이 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한다. 숨쉬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에 깊이 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쉴 때 마음의 긴장과 불안이 어느새 풀어진다. 이러한 긴장이완 효과뿐만 아니라 수식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끝에 둔다. 그리고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숨이 차다고 알며,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것을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다고 알며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안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날숨 모두 이와 같음을 안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안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고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이다.

 

부정관(不淨觀)


부정관(不淨觀)이란 말 그대로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이렇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옆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 마음을 집중한다. 또는 마음을 미간(眉間)에 둔다. 그 다음에는 앉은 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은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한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y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속에 왔다 갔다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씀씀이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어로 중국에서 한역을 하면서 삼매로 정리된 것이다.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흔히 독서에 몰입한 사람을 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말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2) 참선


참선(參禪)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자성자리를 밝히는 데 있다. ‘본마음.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하다.


이러한 청정무구심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 『금강경오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보스님의 게송이 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리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티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려질 리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 준다고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의 이지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참선의 자세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좌선의 자세를 연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선수행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 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종 가람의 입구에는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텅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 는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음알이를 쉰다고 하는데, 그러면 알음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 온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걸림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둘째, 앉는 자세는 먼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셋째,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넷째, 허리와 양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는 자세이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 된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해 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 쉰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 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4)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한다.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이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일갈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 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5) 참선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점검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에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점차 남의 허물이 눈에 더욱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점검해 볼 여지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이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남편이나 직장 상사를 부처님이나 스님 대하듯이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아랫사람에게 겸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한 수행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격과 조건이 되는 이를 공경하기는 쉽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정한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이에게 공경심과 겸허함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결국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귀한 마음가짐으로서, 일상에서 선을 닦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한편 참선을 제대로 닦는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無爲)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선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복을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갈 일이다. 
 

 

5. 육바라밀

 

불교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최종 목적지는 〈오분향 예불문〉의 맨 마지막 구절에서 보이듯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너무나 깊고 넓어 이제 막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따르고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팔만 사천의 경전들과 많은 계율들 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경전에 대한 주석서들과 많은 불교관련 서적들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따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서 공부할 육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이란 보살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여섯 가지 실천 덕목으로 불교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 세계에 오기 전에 도솔천에서 보살로 계셨는데 이 육바라밀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여섯 가지의 바라밀은 생사윤회의 바다를 건너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뗏목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 너무나 친밀한 대지 문수 사리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 등의 보살들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는 아라한과는 달리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 제도를 위한 수행을 구분하지 않는, 즉 이 여섯 가지 바라밀에 의지해서 정진하여 그 수행의 단계가 이미 부처님이 될 수 있을 만큼 높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중생 제도를 위해 계속해서 보살로 남고자 서원을 세우신 분들이다.

또한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 즉 본래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이 육바라밀에 의지해서 정진하면 누구나 다 보살이라 할 것이다.

 

육바라밀에서 여섯 가지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pa-ramita-)를 소리로 옮긴 말로 ‘완성’이라는 뜻과 ‘피안(彼岸 :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보시 바라밀이란 보시의 완성 또는 보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1) 보시 바라밀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법구경』

 

옛날 인도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어주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었다. 그런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福田)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 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첫째는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는 행동으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이라 한다.

 

-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라고는 하지만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자진해서 베풀 때는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따금 하는 보시라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보시하는 경우, 이를 보시바라밀이라 부른다. 만일 남에게 주고 나서 뉘우침이 생긴다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주고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궁극의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는 사람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직 대승의 궁극적 깨달음인 영원의 법을 위해 보시하고, 세상에 삶을 받은 모든 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보시하고, 모든 사람의 번뇌를 끊어주기 위해 보시한다. 『대반열반경』 -

 

이처럼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2) 지계 바라밀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의 과보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체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은 반드시 되돌아보라.『숫타니파타』

 

3) 인욕 바라밀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마치 초보 운전자가 길과 교통체계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와 이해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하겠다.

 

4) 정진 바라밀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한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일이 중요하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5) 선정 바라밀


선정(禪定)은 참선 수행을 말한다. 중생의 마음은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청정한 것이나 탐욕과 혐오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한 번뇌에 의해 그 참된 성품이 가려져 있고 그 청정한 마음은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경전과 같은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참선 수행을 통하여 그 본래의 마음을 직접 살펴 번뇌를 제거하여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은 명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참선과 달리 명상은 오직 자신의 몸의 건강함과 마음의 자유만을 추구하고 철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내부적 반성과 성찰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지 않기에 현재의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은 무시하고 현재의 자신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명상을 통해 비록 마음의 자유를 얻어 성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깨달은 자유에 대한 집착만은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참선 수행 방법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좌선(坐禪)이다. 좌선이란 몸을 깨끗이 하고 조용한 곳에 앉아서 보는 것, 냄새 맡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신체의 접촉 그리고 마음의 잡념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에서 본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좌선을 통해서 최종적으로는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가는데 삼매란 말로는 정확하게 그 뜻을 서술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만 짐작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조금도 차별이 없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닌다. 둘째는 마음을 하나의 본래 자리에 머물게 한다. 셋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넷째는 마음이 조화롭다. 다섯째는 마음의 자세나 생각이 항시 바른 곳에 머문다. 여섯째는 매사에 구분 짓고 옮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쉬게 하고 우리의 본래 청정한 그 마음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는 청정하고 영원한 깨달음의 기쁨에 안주한다.

 

이와 같이 선정은 곧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방법으로 특히 불교의 수행 방법 중에서 스님들과 재가 불자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6) 반야 바라밀


반야(般若)라는 말은 불교 신도가 아니라도 한번 쯤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불교 용어이다. 부처님께 예불을 드릴 때 항상 봉송하는 『반야심경』의 반야를 말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크어 프라즈나(prajn~a-)를 소리로 옮긴 것으로 흔히 지혜라고 번역하나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분별의 지혜를 넘어선 분별이 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반야심경』은 이 깨달음의 지혜, 즉 반야 바라밀에 관한 내용으로 그 핵심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들은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을 반야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반야바라밀은 보시, 인욕, 지계, 정진, 선정의 다섯 바리밀의 근본이 되는 바라밀인 동시에 이 다섯 바라밀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의 완성이기도 하다. 즉 반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하며 스스로 계를 지키고 남과 나의 구별에서 오는 탐욕과 분노를 인내하고 정진과 참선 수행을 한다면 그것이 곧 중생 제도를 위한 보살의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것인 동시에 그 자체가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구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관자재보살이 반야 바라밀을 실천할 때 세상의 본질이 공임을 꿰뚫고 괴로움과 재앙으로 가득한 중생의 삶을 구한다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의 실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육바라밀은 사실 각 항목들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결코 하나씩 떼어내어서는 생각도 실천도 할 수 없다. 마치 자동차가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각 부품들이 조화롭게 그 역할을 잘 할 때만이 잘 달릴 수 있듯이 육바라밀 역시 함께 실천될 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육바라밀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 즉 보살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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