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
1. 시대적 배경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탄생되었다. 불교가 탄생될 당시의 인도 사회는 새로운 종교. 사상의 출현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었다.
인도의 역사는 B.C 3000년전 인더스강 유역에 도시는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고 높이 솟은 성채와 평지의 주택가로 성립되어 있는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원주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청동기를 사용하였고, 농경, 목축, 면화재배에 종사하는 한편 외국과 해상, 육상무역을 하였다. 종교는 민간신앙의 형태로 동물. 땅. 나무. 남성력 상징숭배의 흔적이 있으며, 특히 암소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력 기원전 1,500년 경 철기 도구를 사용하던 아리아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코카사스 지방으로부터 펀자브지방으로 침입해 오면서 인도의 문화는 그들에 의해 주도하게 되었다.
아리아인들은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그들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사회제도를 확립해 갔다. 처음 인더스 강 상류 펀자브 지방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자연을 신격화하고 찬미하는 베다(Veda) 문헌을 낳았고 이를 성전으로 하여 브라만교를 탄생시켰다.
브라만교는 초기 베다에서 나무, 물, 태양 등 자연을 신격화하는 다신교적 성격을 보였으나, 그들 신들은 브라만이라는 절대한 신으로 통일되어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믿어 졌다. 브라만교에서는 베다의 권위를 신의 계시라 하여 절대시하였으며 브라만 계급의 사제들에 의해 모든 종교적 의례는 관장되었다.
브라만 계급은 아리아인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제도화한 계급제도의 산물이다. 즉, 사제, 왕 혹은 무사, 평민, 천민의 이른바 사성계급을 제도화하였다. 이 중 원주민인 최하층의 천민계급에 속했으며 상위 세 계급은 아리아인들로만 구성되었다.
* 사성(四姓) 계급
A. 성직자계급 - 브라만
B. 왕족.무사계급 - 크샤트리아 (찰제리 刹帝利)
C. 평민계급 - 바이샤
D. 천민계급 - 수드라
아리아 인들의 종교인 브라만교는 사성계급 제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즉, 원주민들로 구성된 천민들은 브라만교에 입교할 자격이 없었으며 반면 브라만 계급은 종교의식을 관장하여 모든 사람들의 종교적 삶은 그들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베다의 끝이라고 불리워지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만이 인간에 내재하는 아트만(atman 자아)과 동일하다는 이른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체험이 종교적 실천의 이상으로 제시되었으나 사제를 통한 종교적 삶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브라만 계급의 사제들은 ‘인간의 신’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B.C 6C경 불교가 탄생할 무렵 인도의 사회는 이러한 전통이 크게 흔들이는 전환기였다.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강 유역으로부터 야므나강을 거쳐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에 이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면서 많은 농산물을 산출하게 되었다.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은 잉여물자를 산출함으로써 교역을 촉진하고 또 농경에 필요한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의 생산도 촉진하여 수공업을 발달시켰다. 그러한 결과로 새로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도시를 이룩하게 되었고, 이들 소도시를 중심으로 다수의 군소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로 말미암아 국가를 통치하는 왕족과 경제적인 실권을 가진 장자(長者)들이 사회 전면에 부각되었고, 그것은 곧 사제계급인 브라만의 약화를가리켰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전통적 종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불교의 자료에 의하면 62가지(62見), 자이나교에 따르면 363가지 다른 견해들이 당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6가지가 육사외도(六師外道 - 도덕부정론, 유물론, 숙명론, 불멸론, 회의론, 자이나교)라 하여 불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신흥 사상들의 공통점은 베다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따라서 브라만 신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요소들이 모여 존재를 나타낸다고 보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출가하여 대부분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였으며 스스로를 '사문(沙門)'이라 불렀다.
이처럼 당시의 종교. 사상계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와 함께 새로운 사상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참 삶의 길로서의 불교의 출현은 하나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2.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 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도솔천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도솔천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한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한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그 중에서 남잠부드비파(남염부제 南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된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아(찰제리 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이다.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는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이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정반왕淨飯王)과 마야왕비(摩耶王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한다.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한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堂安之) '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이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1) 부처님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카필라국 - 현재 네팔 타라이지방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 인도국경과 네팔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다는 카필라왕국에서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왕(Suddhodana, 정반왕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왕비(Maya, 摩耶)이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다.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 콜리)족의 공주였다.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정반왕이 40살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전에 의하면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콜리성 데바다하(Devadaha, 천비성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i)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우수나무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룸비니 동산'은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에 속한다.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i)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쇼카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藏)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이다.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쇼카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다. 특히 아쇼카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쇼카)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그는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탄생게(誕生偈)'를 외쳤다고 한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니, 온 세상의 모든 고통 내 이를 평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堂安之)
'탄생게'로 불리는 이 외침은 실제 있었던 일의 기록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던가? 첫째로는 인간의 성품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일깨우기 위해서 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홀로 높은 나(我)'는 개체적인 '나'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 성품, 참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나'의 실현이야말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까닭이다. 둘째는 고통속에 있는 세계,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삶을 그리는 신앙인의 눈에는 적어도 그 두 가지를 위해 오셨던 분이 부처님이셨다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처음으로 그런 외침을 하셨다고 한 것이다.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석가족남자성은 '고타마'이고, 태자의 이름은 '싯타르타'라고 지었는데, 그래서, 부처님의 어릴 적 성과 이름은 ' 고타마 싯타르타 '로 이는 '모든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은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였다.
초기성전에서는 부처님의 어릴적 이름 중 성은 고타마(Gotama, Gautama, 구담瞿曇)로 이것은 '가장 좋은 소 또는 최상의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이다. 그의 이름은 싯타르타(Siddhattha, Siddhartha, 실달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불타(佛陀)란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깨친 사람(覺者)’이란 뜻이며 부처님이란 말도 같은 뜻을 가진다. 그는 석가족(Sakya족) 출신이었으므로, '석가모니'란 ‘석가족출신의 성자’란 뜻 혹은 ‘석가족 출신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다.
왕은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히말라야의 예언가인 아시타(Asita)선인을 불러 점치게 하니 아이의 장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왕자는 세상에 있으면전 세계를 덕으로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될 것이고, 만일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 깨달음의 궁극자 정등각자(正等覺者)인 위대한 부처가 되어 사람들을 어두운 무명(無明)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이 아이는 최상의 청정을 볼 것이며, 맡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법륜을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은 널리 퍼질 것입니다."
라며 자신은 나이가 많아 그 때를 지켜 볼 수 없어서 못내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태자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7일만에 세상을 떠나시고, 태자는 계모가 되는 마야 왕비의 친동생 즉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대애도 구담미大愛道 瞿曇彌)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여덟 살이 되자 왕은 태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할 태자로서의 수업을 받게 하였다. 이 제왕의 수업에서 태자는 칼과 창을 다루는 무술과 씨름을 익히고, 코끼리와 말을 타는 방법, 마차를 다루는 방법, 병사를 움직이는 병법을 익혔고, 문법 천문지리에도 능통하여 가르치는 스승을 기쁘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태자의 훌륭한 용모와 기개로 주위에 찬탄을 받았다. 더욱이 싯다르타 태자의 궁중생활은 물질적으로 풍요로 왔다. 궁전에는 연못이 있었고 청, 흥, 백색 연화가 피어있었다. 향이나 의류는 카시산(産)이 사용되었다. 또 겨울, 여름, 우기 의 세 계절에 적합한 세 궁전이 마련되고 여인들과 음악에 둘러싸인 유복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젊은 시절은 남달리 자기 반성적인 사색의 생활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아한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며 이와 아울러 세상에 대한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다른 번민을 하였던 것이다. '사문유관'으로 묘사되는 설화는 바로 태자가 고심하였던 그 원초적인 의문을 구상화시킨 예이다.
2) 태자의 고뇌(苦惱)
태자는 어느 날 봄 임금인 정반왕을 따라 농경제인 춘경제(春耕祭)에 첨석한 일이 있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멀리 보이는 경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농부는 밭이랑을 고르고 있었고 아름다운 산새들의 지저귐이 귓가에 따가왔다. 그때 태자의 눈에 띄인 것은 벌레의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농부의 연장에 찍혀 아직 숨이 꿀어지지 않은 채 몸부림치며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참새가 날아들어 그 벌레를 입에 채어 창공을 나른다. 그것도 일순간 또 큰 독수리가 달려들어 그 참새를 덮쳐서는 어리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일순 태자는 형언할 길 없는 연민의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던 이 자연에는 생존경쟁, 약육강식 등 냉혹한 현실이 있었다. 강자에 의해 짓밟혀야 하는 약자의 숙명을 그는 다소곳이 체념할 수많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농부의 채찍에 시달린 여윈 소, 허위적 거리며 끊임없는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생명의 실상이 측은히 여겨지게 되었다.
농부의 손은 거치른 일 때문에 부르텄고, 그의 이마는 태양에 그을린 채 깊은 고뇌의 주름을 보이고 있었다. '어째서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를 학대해야 하는가?, 끝없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비로서 태자는 큰 나무아래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다.
이를 일러 불전 문학에서는 '염부수(閻浮樹) 아래의 정관(靜觀)'이라 한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세속의 부귀영화는 아무런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행복한 듯 보이는 현실의 허상에 그는 끝내 안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생명들이 당하는 고통은 태자에게 있어서는 곧 자신의 슬픔인 양 느껴졌다. 그는 끝없는 자비의 상념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괴로운 생존들을 진실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명상으로 맡은 시간을 보냈다. 홀로의 시간을 즐기며, 그 명상속에서 풀려질 듯한 생각의 매듭 매듭에 잠기곤 하였다. 부왕은 늘 그 점이 염려스러웠고, 혹시 아시타 선인의 예언 대로 출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어느날 태자는 성문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생활을 구경하게 되었다. 동문(東門)에서는 백발의 허리가 굽은 노인(老)을 보고는인간은 누구나 저렇게 늙는구나를 알았고, 남문(南門)에서는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病)를 보고 병에 시달리는 인생의 괴로움을 알았고, 서문(西門)에서는 죽은 사람(死)의 장사행렬을 보고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통절히 느꼈다.
그러나, 마지막 북문(北門)에서는 출가 수행자를만나 생노병사의 고(苦)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음을 듣고 기뻐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태자가 이 네 성문을 나가 인간의 고(苦)인 생로병사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본 것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싯다르타가 열 아흡 살이 되자 부왕은 서둘러 태자비를 물색하기로 했다. 태자는 결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부왕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한편 부왕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가문 좋고 아름답고 슬기로운 규수를 물색한 끝에 같은 석가족 콜리성 공주 야쇼다라를 태자비로 정했지만, 싯다르타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남의 일 같아서 좀처럼 실감이 들지 않았다.
태자는 야쇼다라(Yashodara)비 사이에서 라훌라(Rahula 장애)라는 아들을 얻었다.
숫도다나왕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곧 분부를 내려 큰 잔치를 베풀고 왕손의 탄생을 축하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작 이 경사를 기뻐해야 할 싯다르타는 이날 따라 그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에야 그는 궁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도 숲속에 들어가 온종일 혼자 명상에 잠기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궁전 안에 이르러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즐거워하는 광경을 보자 비로소 궁중에 경사가 일어난 줄을 알았다. 자기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아, 장애(Rahula)로구나"라고 탄식한 말이 그대로 어린아이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아들이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훌라(장애)'라고 탄식했지만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고 결심했다. 그의 마음은 벌써 히말라야의 산록, 정처없는 구도자들의 손짓 속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 있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고, 나이 들어서는 아름다운 야쇼다라 공주를 비로 맞았으며 라훌라라는 아들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총명과 사색적인 천품을 타고난 그는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하여 늙고 병들고 급기야 죽어야 하는 한계 지워진 상황 속에 던져진 자신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드디어 나고 죽는 문제, 늙고 병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구도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일체를 버리고 혼자 가는 외로운 출가의 길이었다. 스물 아홉(29세)에 그는 성을 떠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3) 부처님의 출가(出家)
오랜 번민의 나날이 흘러간 어느 날 밤 태자는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것은 물론 인도의 오랜 관습을 따른 행동이었다. 인도인들은 고대에 있어서 늘 출가를 이상으로 삼아왔다. 교육을 받고 가업을 계승하는 생활은 노년에 들어서면 반드시 청산하였다. 자신의 가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부부는 히말라야의 숲속에서 명상을 즐겼다. 이윽고 내외마저도 헤어져서 서로서로 해탈의 경지를 찾기 위해 살아가곤 하였다.
마침내 어느 날 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법석이던 지난밤의 궁중은 적막했다. 드넓은 대청마루에서는 지난밤 노래하고 춤추던 궁녀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자고 있었다. 어떤 궁녀는 이를 갈면서 자는가 하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리는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궁녀는 이불을 걷어차 버리고 추한 모양으로 자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 곯아떨어진 궁녀들의 몰골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이 광경을 본 싯다르타는 그들이 가없었다. 또한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을 거기서 본 듯했다.
태자는 이윽고 야쇼다라가 잠든 침실로 갔다. 어쩌면 다시 못보게 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단 하나의 핏줄인 아들 라훌라를 고즈넉히 바라보는 태자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다. '내가 큰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다시 고향 땅을 밟지 않으리라' 밖은 달이 낮과 같이 밝았다. 태자는 맑은 바깥 공기에 심호흡하고서 허공에 대고 힘주어 말하였다. 태자는 마부 찬다카(Chandaka)를 불렀다. 찬다카는 민첩하고 날렵한 왕실의 우두머리 마부(수렛군)이었다.
"나의 애마 칸타카를 끌어다 주게! 영원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 출가를 단행하려 집을 나가기로 했네. 찬다카! 나는 지금 깊은 기쁨을 맛보고 있어. 어떤 강력한 힘이 내 마음을 지켜 주고 있는 듯하네. 난 혼자 떠나지만 무엇인가 지켜주는 한 보호자가 있는 것 같아.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좋은 기분이야. 자, 시간이 됐다. 나는 길에 오른다. 구원으로 가는 길에. 해탈로 가는 길에.....?"
찬다카는 슷도다나 왕의 엄중한 명령을 생각했다. 태자에게 말을 내어주어서는 아니 되리라. 하지만, 태자의 그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을 보고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태자의 말 칸다카를 끌어왔다. 태자는 칸타카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고상하다! 아름답다! 칸타카, 나의 길에 동반해 다오. 이 밤 나는 길을 떠난다. 너의 도움을 다오. 이 길은 외롭고 험하다. 쾌락의 길에는 많은 이들이 기꺼이 따라간다. 그러나, 진리와 지혜를 찾으려가는 길에는 한 사람의 동반자도 따라가 주지 않는 법. 왜냐하면, 그 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칸타카! 너의 힘을 빌려다오. 너의 빠른 발을 빌려다오. 세상은 외롭고 험한 이 길의 동반자인 너의 이름을 길이 기억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덕으로 부처가 되어 인간과 하늘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다 구제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자는 마치 친구에게 하듯 말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말 잔등에 올라 앉았다. 밤은 고요하고 드맑았다. 칸타카는 태자의 속 마음을 안 듯이 발소리를 죽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싯다르타는 성을 벗어나자 길을 재촉해 말발굽 소리만이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그는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로부터 떠나고 있었다. 점점 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숲에서 밤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을 뿐 태자와 찬다칸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아누피야 고을을 흐르는 아노마강을 건너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벽의 맑은 강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싯다르타는 말에서 내렸다. 허리의 칼을 들어 번뇌와 미흑을 끊어내듯 스스로 머리를 깎고 깨끗한 강물에 씻었다. 찬다카는 눈물을 흘리며 그 모양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싯다르타는 몸에 지녔던 패물을 찬다카에게 내주며 말했다.
"찬다카여! 이것을 부왕께 가져다 드리고 나의 말씀을 전해다오. 세속에 대한 욕망은 없으며, 다만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길을 가노라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다른 패물을 주면서 이런 부탁도 했다. 이것은 이모님과 야쇼다라에게 전하여라, 내가 출가사문이 된 것은 세속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와 자비의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해다오."
그때 마침 사냥꾼이 그들 곁을 지나갔다. 태자는 호화로운 옷을 벗어서 사냥꾼에게 주고 사냥꾼의 거칠고 해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깎고 다 해진 옷을 걸친 싯다르타의 모양은 누가 보아도 도를 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29세였다. 이렇게 성을 넘어 출가한 것을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한다.
4) 부처님의 고행(苦行)
태자는 약 6년간에 걸친 고행을 시작하였다. 팔리(pali) 불전의 기록에 따르면 태자는 첫 1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스승을 찾아 헤매였다고 한다.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을 만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빔비사라왕은 고귀한 싯다르타의 모습을 대하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나라의 대신으로 삼아 볼 생각도 하였으나 태자 굳은 결의를 보고는 못내 아쉬워하며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부디 대각을 얻으신 후에는 나와 백성들을 위하여 가르침을 펴시라.'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한 지 2년째 되던 해부터 갖가지 고행의 수련을 쌓기 시작하였다.
첫번째 찾아간 수행자는 "박가바"라는 고행주의자였다. 그들의 극한적 고행을 보고 내심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 고행의 목적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있음을 알고 이에 만족치 못하고 그를 떠났다.
두번째로 간 곳은 그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갠지스강을 마가다국 라자그하라(왕사성)의 바이샤알리(Vaisali: 빈다산)에 있는 히란야밧티(Hiranyavali,현재는 Gantak라고함) 강가였다. 그 곳에는 유명한 요가의 스승들 수행주의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 두 선인이 삼백명의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도 그 일행으로 함께 수도하였고, 곧 스승에 의해 큰그릇임을 인정받았다. 태자는 스승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수도처를 옯겼다. 그는 오랜 수련으로 여러 가지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오랜 단식을 할 수 있다든지, 또는 호흡을 정지할 수 있다든지 하는 요가의 기교에 숙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부산물일 따름이었다. 그는 여전히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는 비밀을 알지도 못했으며, 이 괴로운 실존을 초월하는 폭넓은 예지를 증득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이 심각한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도시에 둘러싸인 왕사성이라는 산속이었다. 그는 영축산의 산림속에서 흑독한 수련을 계속하였다. 그때 그분은 부왕이 보내준 다섯명의 출가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련을 계속하였다고 전한다. 몸을 가시덤불위에 굴린다든지, 뜨거운 모래밭에 내맡기는 일등은 인도 고행자들이 흔히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애욕의 근원인 이 육신을 괴롭힘으로써, 영원한 자아(Atman)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빗대어 불전문학에서는 '설산수도(雪山修道)'라 표현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고행을 시작한지도 다섯 해 그토록 모진 고행을 겪은 태자의 몸은 쇄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등과 배가 맞붙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그럴수록 그의 정신세계는 더욱 집요하게 하나의 근원을 향해 응집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 전에 그가 품었던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때 태자는 이렇게 마음을 바꾸었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고행의 궁극으로 얻는 것은 결국 목숨을 잃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인제 나는 고행을 증지하고 단식도 그만 두며 다른 방법을 통해 대각에 접근해야 하리라. 그리고 지나치게 지쳐버린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나강으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우루벨라 촌장의 딸인'수자타'에게서 한 그릇의 우유죽(유미죽)를 얻어 마셨다. 우유의 맛은 비길데 없이 감미로 왔다. 그것을 마시고 나니 그의 몸에서는 새 기운이 솟아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옛날과 같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드디어 고행을 버리고 네란자라 강에 나아가 목욕을 하고 수자타라는 한 여인으로부터 우유죽을 공양받았다. 이를 보고 함께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며 그를 떠나 사르나트 교외에 있는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심기일전한 싯다르타는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가 한 보리수(핍팔라나무) 아래 지나가는 목동이 준 길상초(吉祥草)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앉아 "우주의 실상을 깨치기 전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하는 결심을 하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5) 부처님의 대각(大覺)
이제 앞에서는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마음은 날듯이 흘가분했다. 모든 것이 맑고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다.
'순수한 명상에 의하여 대각을 얻기까지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의를 품은 채, 이때 마왕 마라(Mara: 일명 마왕 파순)가 그 분의 곁에 와서 대각을 방해한다.
마라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첫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딸, 둘째는 '감미로움', 셋째는 '성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태자를 유혹하였다. 싯다르타는 이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마왕 파순을 굴복시키고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無上正得正覺)를 이루었다.
위와 같이 마왕을 굴복시키고 미증유의 깨달음을 이룬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수하항마(樹下降魔)'라고 한다.
드디어, 밤의 첫눈이 뜨였을 때 싯다르타는 첫 번째 지혜에 이르렀다. 지난 전생에 일어났던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밤의 눈이 반쯤 뜨였을 때 두 번째 지혜에 이르렀다. 현재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해했다. 밤이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세 번째 지혜를 얻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루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해했다.
이레째 되던 새벽, 주위는 새로운 고요에 휩싸이고, 샛별이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한다. 명상에 잠긴 태자의 마음은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먼동이 틀 무렵 드디어 확연한 깨달음이 싯다르타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이 생존을 윤회속에서 허덕이게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무엇이 삶에 내재되어 있는 업의 덩어리인가.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한결같이 하나의 확신을 가진 채 대답해 주고 있었다. 이로써 구도자 싯다르타는 존재의 실상을 깨친 부처님이 된 것이다.
밝은 새벽 별을 보고 깨쳤다하여 이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라고 부른다.
그 때 대각을 이룬 나이가 '35살'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싯다르타가 아니였다. 몸은 비록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평범한 존재였지만 이제 그분은 위대한 분, 대각을 얻으신 분, 붓다(Buddha)가 되신 것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을 초월한 분, 모든 생명의 초월자이면서도 그 생명의 싹 속에 의미를 주는 분으로 부처님은 탄생하신 것이다. 대지는 진동하였으며, 하늘에서는 천화(天花)가 나부꼈다.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싯다르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생각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가 처음 출가하여 수행한 동기는 우선 자기 자신의 구제에 있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고뇌의 실상을 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사랑하는 처자와 태자의 지위도 내던지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이제 보리수 아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자 자기 자신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에게 널리 전해 해탈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본 부처님의 자비였다.
그는 이제부터 중생들을 구제하는 길에 나서기로 새로운 뜻을 세웠다. 그러나 마왕은 부처님께 그 깨달음의 내용을 전파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소(牛) 있는 자는 소로 말미암아 즐겁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즐겁다. 그대는 이 세상에 의지할 데가 없지 않은가" 그에 대해 부처님의 대답은 의연하였다. "소 있는 자는 소로 말미암아 괴롭고, 자식 있는 자는 자식으로 말미암아 괴롭다. 여래는 의지할 바 없음을 의지함으로 기쁨을 삼노라!"
부처님은 결연히 보리수를 박차고 중생을 향해 걸음을 옮기신다.
'이 세상이 어두워질 때, 나는 쉼 없는 진리의 북을 치리라'
깨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것은 말이나 생각으로 미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침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몸소 깨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한 바를 좇아 생각해 본다면 첫째 정적(情的)으로 그것은 한량없는 기쁨이다. 둘째, 지적(知的)으로는 '하나'인 세계의 체험이다. '나'다 하는 벽이 깨져 나와 남, 나와 우주가 하나되는 것이다. 끝으로, 의지적(意志的)으로는 진정한 자비의 실천이다. 나와 중생이 하나 됨으로써 동체자비의 실천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6) 부처님의 전법(轉法)
부처님은 대각(大覺)을 이루신 후 '무명(無明)의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중생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을까?'라고 부처님이 고민을 하면서 교화활동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자, 범천이 부처님에게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려 주실 것을 청하여, 드디어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일어나 중생제도의 길에 나섰다.
위와 같이 범천이 부처님께 전법도생(轉法度生)을 권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이라고 한다.
대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사르나트(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였다고 '전법륜경'에 전해 오고 있다.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첫번째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초전법륜(初轉法輪)' 또는 '녹원전법(鹿園傳法)'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은 것, 병드는 것, 죽어야 하는 것은 고통일지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원한 있는 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고통이니라.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이니,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서 뿌리박은 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니라. 무엇이 이 고통의 근본이랴?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은 것, 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니라. 고통의 소멸을 열반이라 하느니라. 갈애의 피안을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에 안주하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을까? 올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업을 지니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갖고, 올바로 기억하고, 올바로 노력하고, 올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 바로 열반을 얻는 방편이니라."
부드럽고 차근차근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비구는 이내 그 길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진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가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한동안 녹야원에 계실 무렵, 바라나사에 야사라고 하는 큰 부자의 아들이 있었다. 이 젊은이는 왕에 못지 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고 어여쁜 아내와 많은 시녀들에게 둘러 싸여 애욕의 생활에 빠져 있었다. 하루는 흥겨운 잔치를 끝내고 잠에서 깨어난 야사는 그때까지 지쳐서 자고 있던 여자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았다.
그토록 아름답던 시녀들의 추하게 자는 꼴에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와 괴롭다고 외치면서 돌아다닐 때 부처님께서 야사를 불러 법을 설하였다.
야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마음은 점차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 것이 다시없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았다. 부처님은 야사에게 인생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야사는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얼마 후 야사의 아버지도 아들 야사의 뒤를 따라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고 제자가 됨으로써 교단사상 최초의 남자 재가신도(우바새)가 되었다. 야사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최초의 여자 재가(우바이)가 되었다.
또한 야사의 뒤를 이어 그의 친구 56명도 함께 출가하여 비구가 됨으로써 승단은 어느덧 62명의 단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윽고 그들의 공부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부처님은 그들을 각각의 지방으로 파견하여 교화할 것을 명하고 스스로 마가다국 우루벨라로 향했다.
부처님께서 61명의 제자들에게 중생교화를 위해 길을 떠날 것을 선언한 것을 '전도선언(傳道宣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자! 이제 전도의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잡아함경>
첫째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함이요,
둘째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대중을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요,
넷째는 믿음이 없는 이를 믿게 하기 위함이요,
다섯째, 이미 믿는 이를 더 굳세게 하기 위함이요,
여섯째, 다루기 어려운 이를 잘 다루기 위함이요,
일곱째,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이를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요,
여덟째, 현재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아홉째,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함이요,
열째, 바른 법을 오래가게 하기 위함이다.
계율을 말하려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하라. 어떤 비구가 부정한 행을 범하고 음행을 범하면 그는 파라지카(根本罪)이다. 함께 살지 못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비구들에게 프라티목샤(계목 戒本)의 첫째 조문을 제정하고 널리 알렸다. 이때부터 때와 곳을 따라 비구들의 잘못을 보실 때마다 널리 가려내어 말씀하였다. 그래서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마련되었다.
뭇중생들을 위해서 45년간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쉬지 않고 교화활동을 펴신다.
7) 부처님의 열반(涅槃)
부처님이 80세가되시던 해, 부처님께서는 벨루바(Beluva)라는 곳에서 여름 안거를 지낸다. 이곳은 바이샤알리 부근에 있었다. 우기가 걷히자 부처님께서 북으로 발길을 옮겨 리치치하비스(Lichchavis)라는 부족이 사는 마을을 통과하신다. 그리고 파바(Pava)라는 마을에 묵으실 때 대장간을 하는 춘다(chunda)의 공양을 받으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쿠쯔타(Kakutstha)의 강둑에 닿으신다.
그 곳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Kushinagara)에 닿으셨다. 사십여년을 곁에서 모신 아난다(Ananda)에게 사라(Sara)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하라고 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마치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족(Malla)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아난다여, 나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구나, 나의 여정은 이제 막을 내리려 하노라. 나는 이제 팔십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아난다는 눈물을 삼키며 이 슬픈 소식을 말라스의 사람에게 전하고, 다시 부처님께 그 삶을 연장시킬 수 없겠느냐고 간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로 제자들을 달래시고, 슬픔에 잠겨 사라수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자 했다.
이때 쿠시나가라의 100살이 넘은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시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말씀하시었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워 지자 무수히 모여든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이든지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자리이타의 법을 다 갖추었으니 만일 더 오래 머루른다 해도 이 이상 이익될 바가 없을 것이다. 마땅히 제도할 사람은 이미 다 제도했으며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이가 있더라도 득도의 인연을 모두 지었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더 풀어쓰면,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제행무상 불방일정진'(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기셨다.
이 말씀을 남기고 부처님께서는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이야말로 진리 속에 살다 진리 속에 가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다. 그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들어 보였다. 그가 들어 보인 길은 다름 아닌 지혜와 자비의 길이었다.
그로부터 일 주일 동안 부처님의 육신은 꽃으로 장식되어 많은 이들의 충심으로부터의 송별을 받았다. 돌아 가신지 꼭 일주일이 되던 날 육신은 마쿠타반다나(Makutabandhana) 사원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그분이 가장 아끼던 제자 '마하 캇사파(MahaKasyapa: 마하가섭)'를 기다리기 위한 조치였다.
부처님께서는 열분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사리풋다(사리불) 목갈라나(목건련) 두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상수제자였던 마하캇사파(마하가섭)는 이때 다른 지방으로 전교를 떠났던 것이다. 가섭이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두발을 관밖으로 내어 가섭에게 보이신다. 마하캇사파는 스승의 육신에 정례하고 장례를 비롯한 교단의 사후수습을 진두 지휘하였다.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마하가섭에게 관밖으로 두발을 내보이신 것을 불전문학에서는 '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이라고 한다.
부처님 입적 소식은 인근 여러 나라에 퍼졌으며 평소에 부처님을 존경하던 모든 이들은 이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화장 후 그 분의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분쟁이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타협을 보지 못하고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때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드로나(Drone)라는 현자가 있어서 중재를 시도, 그 사리를 똑같이 8등분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 그 사리를 정중히 모시고 가서 '스투파(Stupa: 탑)'를 세우고 깊이 공양하게 되었다.
* 부처님의 일생중에 부처님을 슬프게 한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석가족이 코살라국에 멸망을 당한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든 것이고, 셋째는 부처님의 사촌인 아난다의 형이었던 데바닷다의 반역이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교단이 커지자 마가다국의 태자 아자타삿투의 후원을 받아 부처님의 교단을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며 자객을 보내고, 높은 산에서 바위를 굴리고, 성질이 포악한 코끼리를 풀어 부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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