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선사 일화
1. 음식에 넣은 독약을 털고
경허 스님을 모시고 있던 관섭寬燮이라는 행자行者가 겪은 일이다. 그 관섭이 어린 속견俗見으로, 다른 법문法門은 다 좋지만 스님의 무애행無碍行하시는 것만은 마땅치 않아 질색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스님의 곡차 심부름을 하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던 어느 날 마침 안주를 사오라고 스님이 돈을 주자 시봉은 안주를 사고 난 나머지 돈으로 몰래 비상砒霜을 샀다. 수도修道는커녕 술심부름의 시봉侍奉을 하기도 몹시 귀찮은 마당에 비상이나 먹고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막된 생각으로 몰래 흉계를 꾸며 곧 비상을 쿵쿵 빻아서 구운 안주에 골고루 뿌려 넣었다.
그리고는 술과 안주를 스님께 천연스레 갖다 드렸다. 스님이 이것을 잡수려고 하는 터에 시봉은 막상 겁이 덜컥 나서 방을 빠져나가 뒷문에서 문구멍으로 숨을 죽이며, 스님의 동정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저걸 자시나 안 자시나. 드신다면 곧 쓰러질 게 아닌가. 충격적인 장면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보려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님은 곡차를 한 번 쭉 따라 드시고, 안주를 집어 잡수시기 시작하자 뭔가 버석버석 입안에 씹혀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씹혀지는 것만 차례로 골라 털어 버리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시기를 계속했다. 비상 마른안주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골라 털어 낸 뒤 남김없이 맛있게 끝까지 자시고는 “아, 참 잘 먹었다” 하시는 게 아닌가. 돌아가시기는 고사하고 비상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 무심 도인無心道人의 경계를 육안肉眼으로 지켜본 시봉은 기적 같은 일에 겁도 나고 무서워서 이 사실을 가슴 속 깊이 숨겨두고 있다가 후일에 만공 스님께 자진하여 지난 날 경허 큰스님께 저지른 일을 고백하여 참회를 하고 용서를 빈 일이 있다. 경허 스님은 비상인 줄을 알면서도 놀라지도 않고 끝까지 맛있게 다 자셨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실을 말한 일도 전혀 없었다.
2. 스님의 기품에 압도당하고 만 부자富者
경허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했던 천장암은 지금도 가난한 작은 암자라 신심 깊은 불자들만 참배할 뿐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최근에는 천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다듬어져서 참배객들에게 별 불편을 주지 않지만, 경허 스님이 머무르던 조선조 말에는 그야말로 벽촌 오지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라 신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절 살림도 어렵기 그지없었다.
걸핏하면 조석 끓일 양식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더더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시대였고 백성들 또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주가 넉넉히 들어올 리 없었고 공양미인들 넉넉히 가져올 리 없었다.
그래서 그때 천장암에 기거하던 스님들은 누구나 바랑을 메고 멀리 해미읍까지 탁발을 나가곤 했다. 물론 경허 스님도 직접 탁발을 나갔다. 하루는 경허 스님이 해미읍 어느 솟을대문 앞에서 탁발을 하려고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목탁을 두드리니 이윽고 대문이 열리더니 밥술깨나 먹고 행세깨나 하고 살 법한 양반이 거드름을 피우며 경허 스님께 힐문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가자는 것 같은데, 그대는 과연 중이란 말인가, 거렁뱅이란 말인가?”
경허 스님은 합장하여 예를 갖춘 후에 나직이 대답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거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경허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양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양반은 범상치 않은 스님의 기품에 눌려 무례를 사죄하고 극진히 안으로 모셔 크게 시주했다. 이렇듯 숭유억불 정책 시절에도 해미읍과 홍성 인근의 유생들이 경허 스님의 덕화에 감동하여 천장암 중창 불사에 크게 동참한 기록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스님의 기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3.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나누어주다
경허 큰 스님이 서산의 천장암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하루는 경허 큰 스님의 형인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이 인근에 사는 갈산 김씨네 사십구재를 올리려고 장을 크게 보아다가 온갖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당시만 해도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라 동네에 큰 제사나 잔치가 있다고 하면 떡과 과일을 얻어먹으려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천장암에서 아무 날 아무 시 갈산 김씨네 사십구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장암으로 모여들었다. 법당 안에 차려놓은 온갖 떡과 과일, 동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군침부터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사십구재를 올리려고 주지 태허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오고 경허 큰 스님도 법당에 들어섰다. 지극정성으로 사십구재를 올려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려고 갈산 김씨네 가족들도 엄숙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막 사십구재를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법당 밖에 구름처럼 몰려와서 법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난 경허 큰 스님이 느닷없이 법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더니 떡과 과일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고는 법당 밖에 서 있던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닥치는 대로 나눠주는 게 아닌가. 주지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아직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나눠줘 버리다니!”
상주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때 경허 큰 스님이 한마디 했다.
“제사는 바로 이렇게 지내는 게 제대로 지내는 것입니다. 영가께서 극락왕생 하려면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베풀어야 하는 법이거늘, 여기 모인 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과 과일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이 공덕으로 영가께서는 반드시 극락왕생하실 것이오.”
이 말씀을 듣고 난 상주들은 기쁜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경허 큰 스님께 합장 배례했다.
4. 조실 스님이 젊은 아낙과 한방을 쓴 까닭
경허 큰 스님이 가야산 해인사의 조실로 있을 때의 일이다. 큰 스님은 이미 곡차(술)와 육식을 거리낌 없이 하는 터라 젊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북풍한설이 몹시도 몰아치던 날, 수건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어느 젊은 아낙이 큰 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경허 큰 스님은 아낙과 한방을 쓰고, 그 아낙과 겸상으로 공양을 했다.
수행자들 사이에 서는 다시 말이 많아졌다. 아무리 도통한 큰 스님이기로 곡차에, 육식에, 이제는 여색까지 탐하다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가 제자들이 참지 못하고 스승께 읍소했다.
“스님, 제발 그 여자를 그만 내치소서.”
제자들이 하도 읍소를 하니, 문제의 아낙이 드디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낙은 나병에 걸려 코도 없고 얼굴도 문드러진 중환자였다. 아낙은 울면서 말했다.
“큰 스님께서 따뜻한 방에 재워주시고, 따뜻한 밥 먹여주시고, 고름까지 닦아주셨으니 이제 곧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낙은 정처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경허 큰 스님도 걸망 하나 메고 해인사를 떠나면서 말했다.
“인연 없는 중생들은 어쩔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