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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 성채(城砦) [유 하/시인]

by 범만 오승규 posted Dec 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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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영화나 음악 감상, 산책…. 제법 쓸만한 잡념들을 얻기 위해선 이러한 '한가한 시간'들에 전적으로 자신을 투자해야 한다. 말하자면 속도전의 현실로부터 이탈하여 '느림'에 충실하게 봉사할 때 비로소 귀중한 자산인 잡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엔 보다 많은 잡념을 만나기 위해 산책을 하곤 한다)∼


∼느림은 많은 친구를 갖게 하고, 많은 사랑을 갖게 한다. 나무와 풀들, 다람쥐, 산새, 들꽃들, 바위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느린 산책가의 눈은 그 모든 것들에게 시의 잎사귀를 달아준다. 달팽이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달팽이 시인을 꿈꾼다. 느린 사랑, 느린 열정을 통하여 마침내 자기만의 존재의 집을 갖게 된 달팽이 시인을. 산 중턱을 지나면서 피어난 들꽃들을 본다. 아니 피었다가 이미 져버린, 그리하여 땅의 일부분으로 거듭 태어난 꽃의 내세를 본다. 그 옛날엔 화려한 꽃 시절에 대해 주목했지만, 이젠 꽃이 떨어져나간 자리의 환한 상처와 땅의 향기를 향해 고통스레 자기의 문을 열어 가는 져버린 꽃의 운동성에 대해 사색한다. 느림이 잉태해내는 잡념의 시간들, 그것은 분명 이 가속도의 현실 속에서는 '무익한' 시간들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욕망은 내 발걸음을 점점 그 무익한, 쓸모 없는 시간 쪽으로 내딛게 한다. 한때 내게는 허송세월에 대한 약간의 자책이 있었으니, 지금은 그 욕망을 거스를 마음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좀 더 멋진 잡념을 얻기 위해 그 쓸모 없음의 끝까지 가볼 작정이다.∼


…中略…

∼여기서 다시 한 이탈리아 작가의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우리는 무익한 것에서 생명을 얻고 유익한 일을 하면서 힘을 빼앗긴다.' 어쩌면 문학의 힘은… 전자(前者)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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