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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
2011.08.10 17:17

수덕사에 대해 예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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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의 개요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선(禪)의 중흥도량 수덕사 (修德寺)

운수납자(雲水衲子:구름과 물처럼 수행처를 돌 아다니며 수행하는 스님) 들의 수행정진터,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5대총림(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의 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엽에 숭제(崇濟) 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설을 뒷받침할 만한 또다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일설에는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 원효가 중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다만, 《삼국유사》 <혜현구정(惠現求靜)> 조의 기록을 통해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이미 창건된 사찰임 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백제 말에 창건된 수덕사는 근·현대에 들어서서 경허 성우(鏡虛 惺牛) 스님을 비롯 해 만공 월면(滿空 月面)· 수월· 금오 태전(金烏 太田) · 벽초 경선(碧超 鏡禪)· 대의(大義)· 청담 순호(靑潭 淳浩)· 묘리 법희(妙理 法 喜)· 일엽 하엽(一葉 荷葉) 스님 등의 고승이 주석, 선(禪)의 중흥지로 뿌리내려져  있다.

 

1984년에 덕숭총림(德崇叢林)을 개설한 수덕사는 종합수 도도량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혜암 현문(惠庵 玄門)· 벽초 있다. 수덕사의 산내암자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을 비롯하여 경허스님과 만공 스님이 선풍을 휘날리던 정혜사와 금선대 등이 있다. 수선도량으로서 수덕사는 선(禪)의 생활화와 선풍진작의 계승을 위해 선실천(禪實踐)수련대회를 갖는 등 일반인들에게 우뚝 다 가서고 있는 것이다.

 

경선(碧超 鏡禪)· 원담 진성(圓潭 眞性)스님 등이 방장으로 주석하면서 수선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승가대학을 개설해 총림의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으며 일주문 밖의 상가 등을 정비하여 수행환경 정화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람포인트

 

1. 대웅전 측면을 보면 가구(건물의 짜임새)가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특히나 단청이 다 퇴색하고 자연스러운 나무 질감 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다른 곳에 비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2. 직선재와 곡선재의 적절한 배치, 장식적인 포대공과 절묘한 곡선을 이루는 우미량이 서 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나라의 목조가구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수덕사의 설화

덕숭아씨와 수덕이야기의 삽화
덕숭아씨와 수덕이야기의 삽화
수덕사는 충남 서해안에선 으뜸으로 꼽는 절인데 여기에도 전설이 하나 있다. 홍주 목사 고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양반집 아들로 의젓하게 살고 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그는 사냥을 좋아해서 어느 해 가을엔 몸종들을 데리고 사냥을 갔었다. 몸종 들과 산을 둘러싸고 몸종들이 짐승을 몰아 짐승들이 나타나면 수덕이가 화살을 날리어 잡는 그런 사냥이었다.

 

몸종들이 나뭇가지를 탁탁 털면서 “우------”하고 몰아오더니 “노루야 노루야”하고 소리쳤다. 수덕은 화살엔 자신이 있었으므로 언덕 아래에 숨어서 활을 조이며 쳐다보고 있 는데 정말 송아지만한 노루가 자기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오고 있었다.

 

수덕은 바삐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딱 멈췄다. 수덕이 어쩐 일인지 화살을 날리지 않고 멈추자 “도련님 노루예요. 어서 화살을 날리세요” 몸종들이 화살을 날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우성이 커질수록 활시위에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끝내 노루를 놓치고만 몸종들은 섭섭해 했지만 그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루가 뛰어올 때부 터 화살이 잡은 노루의 방향에 어여쁜 낭자가 똑같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루가 사라지자 뛰어가던 낭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선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사라지 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책을 펼쳐도 글씨는 보이지 않고 낭자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는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기를 아끼는 할아범 몸종에게 낭자를 찾아보라 했다. 할아 범은 여러 마을에 수소문한 결과 바로 건너 마을에 사는 덕숭이란 낭자라 했다. 덕숭낭자는 혼자 살고 있는 낭자로써 그 아름다움이나 마음씨가 고와서 온 마을에서도 뛰어난 낭자란 평이었다. 할아범으로부터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수덕은 더욱 고민하다가 밤에 덕숭낭자의 집을 찾아갔고 낭자 앞에서 자기는 꼭 낭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우격다짐을 했다. 그랬더 니 낭자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머리를 떨군다.

 

허나 수덕도령은 꼭 결혼하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새벽닭이 울때까지 덕숭낭자를 졸라댔다. 낭자는 닭 울음소리 따라 머리를 들듯 얼굴을 세우고 수덕을 바라본다. “저와 결혼 을 꼭 하시고 싶으시면 먼저 소녀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세워 주세요.” 덕숭낭자가 절을 세워달라고 원하자 수덕도령은 쾌히 승낙을 했다.

버선꽃
버선꽃

 

그날부터 절간을 짓기 시작했다. 많은 인부들이 작업을 해서 그런지 절간은 바삐 지어졌다. 수덕도령은 낭자 집으로 낭자를 찾아가서 절이 지어졌노라고 전했다. 그랬더니 낭자는 하는 말이 “어째서 절을 지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몸을 탐내십니까. 그런 절은 바로 없어집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 에서 “우루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지은 절간이 부서졌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허나 수덕도령은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이 나 타버렸다. 수덕도령이 날마다 목욕을 하고 몸가짐은 정돈이 되었으나 마음에 부처님보다 덕숭낭자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했다. 그는 잿더미 위에 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엔 참으로 절이 잘 지어졌다.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는 결혼을 승낙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자기 몸에 손을 못 대게 했다. 허나, 어느 날 수덕도령은 참을 수가 없어서 와락 덕숭낭자를 껴안았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문짝이 달가닥하고 떨어지며 이불이 공중 에 뜨더니 자기를 밀어 제치고 이불이 둥둥 떠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낭자는 온데 간데 없고 버선 한 쪽만 쥐어져 있었다. 이번엔 천둥의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들이 살던 집은 불더미가 되고 수덕도령이 앉아있던 자리에 바위가 생겼다. 그리고 그 바위에 버선모양의 꽃이 피었다. 낭자는 관음보살이 화현하여 속세에 와서 살았다 해서 ‘덕숭산’이라 했고 절간은 수덕도령이 지었다 해서 ‘수덕사’라 불리우게 됐다.

그리고 바위에 피는 꽃은 버선모양이라 해서 ‘버선꽃’이라 불리우게 됐다고 한다.




수덕사의 가람배치

일주문
일주문

덕숭아씨와 수덕도령의 설화가 전해내려오는 수덕사에 들어서려면 먼저 일주문을 지나야 한다.


일주문에는 <동방제일선원> <덕숭산수덕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어 수덕사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가람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일심(一心)으로 십선[十 善: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不兩舌)·불악구(惡口)·불기어(不綺語)·불탐욕(不貪慾)·불진에(不嗔에)·불사견(不邪見)]을 닦아 야 부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면서  진속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일주문안으로 성큼 들어가보자. 수행도량답게 금당으로 향하는 길이 정갈하게 참 배객들을 맞이한다.

 

공간의 위계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이고 금강문을 지나야 천왕문이 나온다. 참배객들은 금강문과 천왕문을 통과해야 한다. 통과의례처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곳이지만, 속세와 해탈성지를 구획하는 이 두 곳의 수문장 금강역사와 사천왕상이 금당으로 가는 이들을 안전하게 이끈다. 금강문과 천왕문은 외부의 잡신들이 경내 로 침범치 못하게 하여 사찰을 청정케 하는 수문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금강문. 사천왕문
금강문. 사천왕문

이들은 5백의 야차신(夜叉神:야차[夜叉]:   yak a 8부중(部衆)의 하나. 약차(藥叉)·열차(閱叉)라 음역. 위덕(威德)·포악(暴惡)·용건(勇健)·귀인(貴人)·첩질귀(捷 疾鬼)·사제귀(祠祭鬼)라 번역. 라찰과 함께 비사문천왕의 권속으로 북방을 수호. 이에 천야차(天夜叉)·지야차(地夜叉)·허공야차(虛空夜叉)의 3종이 있음. 천야차·허공야차는 날 아다니지만 지야차는 날지 못함.) 을 거느리면서 현겁천불(賢劫千佛: 현재의 대겁인 현겁의 주겁(住劫)에 이 세계에 출현하는 구류손불·구나함모니불·가섭불·석가모니불·미륵불 등의 천불.현겁은 1천 부처님이 출현하여 세상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렇게 많은 부처님이 출현하는 시기이므로 현겁이라 이름)의 법을 수호한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법(法)의 집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들인 금강역사와 사천왕들은 험악한 낯면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섬뜩하다가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축생( 동물)과 아귀(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사는 중생)를 한발아래 두고 있는 천왕들에게서, 호령하는 듯 입을 벌리고 곧 내려칠 듯 올라가 있는 역사상의 주먹 쥔 손 에서 웃음이 저절로 번져나온다. 

사천왕상
사천왕상

수덕사의 가람조성은 산지형(山地型)이라 조금씩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을 진입해서도 계단을 오른다. 대웅전과 마주하여 전면에 지어지는 누각이 있는데, 황하정루가 보인다. 강 당누각을 가진 사찰에서 중심 불단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누하출입으로 루(樓) 밑을 통과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각(隅角)출입으로 루(樓) 옆으로 돌아가서 진입하는 것이다. 수덕사는  누각강당을 설치하여 누하(樓下 ) 진입형식을 취했다. 가람의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에서는 대체로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문을 설치하는데 수덕사는 불이문은 두지 않았다. 황하정루 누각을 기준으로 속세와 성지를 가름하고 도입부와 전개부로 다시 나누고 있다. 수덕사에서는 여기를 진속의 참 경계선으로 보는 것이다.

 

대웅전과 탑
대웅전과 탑
사찰의 금당인 대웅전은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심권역에 있다. 중심권역으로 나아가는데 각각의 단을 하 단, 중단, 상단으로 나누고 상단 가장 높은 곳에 금당을 배치한다. 수덕사도 그렇다. 불법승 삼보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심권역으로 올라서면 하단 동·서측에 법 고각과 범종각이 좌우대칭으로 마주하고 있다. 서측 범종각의 뒤편에는 승방 무이당이 동측 법고각의 뒤편에는 조인정사가 있다. 중단에는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좌청룡우백호 형상이 라는 요사 청련당과 백련당이 있다. 좌체우용(左體右用)의 개념을 여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좌는 승(僧)을 우는 법(法)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佛)은 상단 중앙에 있다 . 국보49호 수덕사대웅전이다. 대웅전과 같은 상단 동쪽 끝부분에 명부전이 있다. 절의 창건설화가 전해내려오는 관음바위는 대웅전 아래 서측 청련당 옆으로 돌아서 가면 바로 나온다.

 

학자들은 사찰의 가람배치에 따른 분류를 하면서 탑의 유무와 수에 따라 단탑식 쌍탑식, 무탑식(無塔式)으로 나누기도 하고 가람이 들어선 대지의 형태에 따라 산지형이니, 평지형이니, 구릉형 등의 유형분류를 하기도 한다. 가람배치 분류기준  가운데에서도 사원건축의 시원을 탑파에서 찾고 있는 만큼  탑은 중요하다. 그래서 단탑식의 경우에는 가람의 중심에 놓이는 정중탑(庭中塔)과 가람배치와는 무관하게 장엄용으로 한구석에 놓이는 경우로 다시 구분 짓는다. 수덕사에는 세 개의 탑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 황하 정루 진입하기 전에 만공스님이 조성하였다는 칠층석탑이 있으며, 누하진입을 통해 하늘에 닿을것같이 공천(空天)만 보이는 계단을 오르면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을 상징하는 금강보탑 이 있다. 한단 더 올라가면 가장 중심인 위치에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수덕사가람배치는 정중탑배치인 것이다.

삼층석탑. 금강보탑. 칠층석탑
삼층석탑. 금강보탑. 칠층석탑


아주 이른 아침에 수덕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아침산사의 고요함 그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싸리빗자루를 들고 안행(雁行:기러기가 날아가듯 한줄로 걸어가는 모습을 뜻함) 하듯 줄지어 마음 맑히듯 절마당 맑혀가며 비질하는 총림 학인스님(강원에서 공부하시는 스님)들의 울력(대중들이 함께 모여 하는 육체적 노동)절안에서 모습도 참관할 수 있다.


탁트인 도량에서의 소나무 바람향기에 푹 젖어들 수 있는 수덕사에는 덕숭산문의 선세계(禪世界)가 활짝 열려있고 처처에 펼쳐져 있다.

 

 




수덕사의 역사

수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서 현재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서 사찰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대(554-598)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백제의 대표적인 승려인 혜현이 머물렀던 절이기도 하다. 백제 멸망기에는 북부수덕사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수덕사의 옛모습
수덕사의 옛모습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1937년 대 웅전 수리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여 수덕사 대웅전이 고려 후기 1308년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한국의 목조건축 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현재 국보 제49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곳에 단편적인 기록이 보이지만 수덕사가 지금의 사격을 유지하는데는 근대 선승의 대표 자인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총림: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 기관 율원(律院) 등 3대 조건을 갖춘 사찰을 뜻함)으로 그 위격이 한층 높아졌으며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스님을 다수 배출하고 있다.  

 

백제 연꽃무늬 와당
백제 연꽃무늬 와당

백제 침류왕 즉위원년 384년 불교가 들어온 이래 크고 작은 절들이 나라 곳곳에 세워졌다. 중국 기록에도 ‘스님들과 절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현재 백제 사찰로 확실히 남아있는 대표적인 곳은 웅진(공주)의 대통사지, 부여의 정림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그리고 예산의 수덕사 등이다. 수덕사를 제외한 세 절들이 모두 사지로 남아있는데 반해 수덕사는 조계종의 제7교구 본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절 기록 에 의하면 수덕사는 백제 법왕 즉위원년(599) 지명(智命)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지명(智命)은 여기 기록 외에는 보이지 않지만 익산 미륵사 창건을 도운 지명(知命)이란 이 름으로 「삼국유사」에 보이며 중국 진(陳)나라에 유학하고 온 신라승려 지명(智明)이란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나오고 있다.

 

이들 3명의 지명은 독음은 같지 만 한자를 달리 쓰는 모두 다른 인물이다. 수덕사의 지명법사는 아마도 백제의 지명(知命)이나 신라의 지명(智明)에서 차용한 인물일 듯하며 백제의 지명(知命)이 가능성이 높아 보 인다. 따라서 수덕사의 창건 연대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아야 한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수덕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다. 이 책 의 피은편 혜현구정조에는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한 승려로 혜현이 언급되어있다. 혜현은 수덕사를 거쳐 강남의 달나산(월출산)에도 법화경을 강한 법화행자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법화경을 강한 혀만은 마치 살아있는 듯 붉었다고 한다.

 

그런데 혜현이 입멸한 때의 나이를 58세라 하고 그 때를 당나라 정관연간(627-649)의 초년이라 했으니 그가 태어난 해는 569년쯤 즉 위덕왕대(554-598)에서 멀지 않은 해가 된다. 따라서 혜현이 주로 활동한 연대는 위덕왕, 법왕, 혜왕, 무왕의 4대에 걸친 기간이며 이 기간 어간에 북 부 수덕사가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혜현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했다 했으므로 이미 수덕사는 창건되어 있어야 하므로 수덕사의 창건 시기는 위덕왕대나 위덕왕의 아버지인 성왕대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위덕왕대가 가장 타당성 있는 추측이라 생각된다. 수덕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증거는 위 문헌기록 뿐만 아니 라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의 존재로도 유추할 수 있다.

 

수덕사는 백제 멸망기에는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로도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도침과 복신의 부흥운동에 서북부 지역이 이에 호응했다고 하는데 북부 수덕사도 여기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수덕사 삼층탑
수덕사 삼층탑
한편 수덕사에 원효가 주석하고 중창하였다는 말이나, 숭제법사가 법화경을 강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효의 경우는 수덕사 뿐만 아니라 사찰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보통 결부시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엄연히 혜현이란 수덕사의 고승이 있는데 원효를 갖다 붙일 필요가 있을까. 숭제법사의 경우도 통일신라시대 백제인으로도 알려지기도 했던 진표율사가 있었던 그의 스승인 숭제법사(또는 순제법사)와 결부시킨 것 같다.

 

수덕사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렇다할 기록이 없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에서 통일신라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만 고려 후기에 가서야 수덕사에 관한 글을 접할 수 있다. 1937년 대웅전 수리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 건축시 묵으로 해당 정보등을 기록해 놓은글)에 의해 지금의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지어졌음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숭산에 수덕사가 있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수덕사가 옛 날의 명성을 되찾게 된 것은 근대 한국선종의 새로운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영향이 지대하다. 경허스님은 조선시대 말 침체에 빠진 불교계를 되살리기 위하여 여러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전심전력하였으며 만공스님이 그 대표적인 제자이다. 만공스님은 침울한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맞서고 선학원을 건립하는 등 한국불교의 선맥 을 지키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연대 내용
384년백제불교수용
6세기위덕왕대(554-598) 창건.
6-7세기혜현이 법화경을 강함.
6-7세기담징이 벽화를 그리다(전거미상, 동방미디어)/(1) 지명(智命); 전거미 상.
647년숭제법사 법화경을 강함.
660년도침의 백제부흥운동에 참여.
1308년대웅전 축조. 고려말 공민왕 때 나옹이 중수.
1528년대웅전 색채 보수
1530년수덕사는 덕숭산에 있음. 절에는 취적루와 불운루가 있음. 「신증동국여지승람」
1528년대웅전 색채 보수. 대웅전개채기
1592년임진왜란으 로 대부분 사찰이 피해를 입었으나 대웅전은 옛 모습을 유지.
1673년수덕사 괘불.
1700연대수덕사 동종.
1751년대웅전 보수.
1770년대웅전 보수.
1803년대웅전 후면 부연 보수와 풍판의 개 수.
1898년만공스님의 중창불사
1911년사찰령 반포. 30본산제. 마곡사의 말사.
1912년경허성우 입멸(1849-1912)
1924년미륵보살입상. 만공이 조 성
1925년만공스님이 소림초당건립
1937년대웅전 수리시 묵서명 발견. 명찰순례
1937년 3월 11일전국 31본산 주지가 모여 조선불교진행책을 논의. 만공의 총독 힐난.
1941년 3월 10일만공스님 서울 선학원 건립
1946 년만공월면 입멸(1871-1946)
1947년만공탑 건립. 제자 박중은이 설계.
1962년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42개의 말사를 관할. 초대스님에 벽초스님.
1976년일엽 입멸(1896-1976)
1984년총림으로 승격. 덕숭총림.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
1985년혜암현문 입멸(1884-1985)
1986년벽초경선 입멸(1899-1986)
1986년일본 아스카사(飛鳥寺)와 자매결연.
1996년수덕사와 일본 비조사 결연 10주년 기념으로 정림사5층석탑 실모형을 아스카사에 기증 . 아스카사는 수덕사 성보전시관의 건축을 지원. 1996년 11월30일 덕숭총림 수덕사 승가대학 현판식을 원담스님 숭산스님(화계사 조실) 설정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인정사에서 거행.
1998년탑림공원 조성사업
2000년 4월근역성보관 개관. 개관식에는 수덕사 방장 원담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스님, 중앙종회의장 법등스님, 일본 아스카사(飛鳥寺) 야마모토(山本寶純) 주지, 심대평 충남도지사, 문화재청 김주태 전문위원 등 사부대중 6백여명이 참석.




경허선사

경허 선사
경허 선사
경허 성우(鏡虛 性牛, 1849~1912)는 한말에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로 경허는 법호, 법명은 성우, 속명은 동 욱이다. 1849년 전주에서 아버지 송두옥씨와 어머니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홉살 때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계허스님의 지도를 받았으며, 14세 때 동학사의 만화 관준(萬化 寬俊) 강백으로부터 불교경론을 배웠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사 강사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문자공부의 한계를 깨닫고 영운(靈雲)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 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말인가?”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서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긴 후 56세에 만공(滿空)에게 전법게를 전한 후 1912년 함경도에서 입적하니 세수 64세, 법랍 56세였다.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하여 선풍을 진작시켰으니 그의 문하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 한암(漢巖)등 뛰어난 승려들이 배출되었 다. 유교집으로 1942년 중앙선학원에서 「경허집」을 간행하였다.










만공선사

만공 선사
만공 선사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근대 한국선의 자리매김을 한 대선사로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이다. 경 허성우의 제자이다. 1871년 전북 태인군에서 출생하였고, 13세 때 김제 금산사에서 들어가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 진암노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해 동학사의 경허스님의 인도 에 따라 천장사에서 경허의 속가 형님이었던 태허스님을 은사, 경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천장암에서 서너 살 아랫사람에게 ‘만법귀 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혀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이를 화두로 정진하였다. 어느 날 서쪽 벽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일체의 현상이 사라지더니 허공 중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순간 2년이 넘도록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온갖 의심의 덩어리가 사라졌다.
 
다시 통도사에서 무자 화두를 참구하던 만공은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예불 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를 듣고 순간 홀연 아무것도 막힘없고 걸림 없는 큰 깨달음의 희열을 맛보았다.
 
천장암으로 돌아온 만공은 경허로부터 “구름 달 골짜기 산 곳곳이 같으니, 산중 선자의 대가풍일세, 은밀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한 가닥 군세 기틀이 안중에 살아있네”라는 전법게(법을 전하는 게송)를 받았다.
 
만공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간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수행하는 스님 )들을 지도하는 한편, 수덕사정혜사견성암 등을 중창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을 설립하고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 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총독 미나미(南次朗)에 일본의 한국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다음은 당시의 그에 관한 일화이다.
 
미 나미 “조선의 불교란 것이 과거에는 아무리 고유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와서는 부패한 종교가 되었으므로 본관(미나미 지로, 南次朗)의 전임인 데라우 찌 마사다께(寺內正懿) 총독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를 통합하려고 했던 정책은 백번 지당한 것이있다. 이제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므로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만공 “청정본연 하거늘 어찌 문득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지난번 데라우찌 총독은 우리 조선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숱하게 많은 승 려에게 일본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만들어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토록 하여 불교계에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지금 무간아비지옥에 떨 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불교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방편이 법에 어긋남이 없건만 일본불교와 합쳐 잘될 이유가 없으므로 총독 부에서는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 오는 말하는 불교진흥책이란 것도 총독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책이니라”
 
스님은 격식과 계율에 얽매이지 않았다 . 그에게는 숳한 일화가 있다.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와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스 님의 이런 기이한 무애행(無碍行: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하는 행동)은 범상한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겠으나 제대로 갖춘 눈으로 보면 세상을 깨우치는 풍우요 암시였던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전월사(轉月寺)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1946년 입적하니 세수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 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저서로 문도들이 편찬한 「만공어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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